〈 327화 〉 홀로세 대멸종(1)
* * *
****
다음날.
마지막 스테이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최종 보스인 벨라가 시작과 동시에 항복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밤을 쫄딱 새우며 스테이지를 준비했던 안돌할 가문의 가신들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허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하지만 누구도 가주에게 불만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대결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후계자의 군대가 들이닥쳐서 잔스시를 완전히 장악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모든 것이 리한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벨라는 조건 없이 지시를 따르며 명령에 복종했다.
신분과 지위, 능력 고하에 상관없이 지금까지 악질적으로 성매매 업소를 운영해온 포주들은 죄과가 낱낱이 밝혀져서 극형을 면하지 못했다.
본인 의사하고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와서 몸을 팔았던 창기들은 그동안 지불받지 못했던 임금에 넉넉한 퇴직위로금을 합쳐서 전달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정리된 사람의 숫자만 무려 1만여 명.
사업의 규모 자체가 대폭 축소되는 것은 불가피했으며 노예매매와 매춘 양쪽 모두에 엄격한 규제와 관리 기준이 적용되었으며 인간, 이종족, 몬스터를 막론하고 최소한의 존엄성과 기본 권리를 보장하도록 했다.
몸을 파는 성매매는 이제 스스로 원하는 여성에 한정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카지노, 마사지, 클럽, 주점 같은 다양한 유흥업소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지만 성매매는 오직 허가받은 장소로 한정.
헤타이라는 든든한 보디가드들의 호위를 받으며 손님들과 얌전하게 담소를 나누는 아이돌 같은 존재로 재주를 파는 진정한 의미의 [기녀]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들이 유일하게 몸을 허락한 존재가 누구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모조리 감수해야 하는 안돌할 가문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터무니없이 강력한 규제 조치와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자 매상은 벌써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있다.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미지수, 그만두는 직원들도 소굴.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남작 가문의 지위와 그동안 쌓아놓은 자본력 때문에라도 얼마 동안은 버틸 수 있을 테지만, 이런 경영을 계속한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사업 자체를 정리하는 수순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이 소식이 방송을 타고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후계자가 매춘굴을 소탕했다며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하지만 안돌할 가문의 경쟁자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지 못하며 샴페인을 땄다.
이제 왕국 화류계를 지배하는 일인자가 쓰러졌으니 자신들의 시대가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만.
“현재의 지표는 신경 쓰지 말고 지시대로 사업을 추진해라. 자금이 모자란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지. 잔스 시를 왕국 최고에서 대륙 최고의 환락 도시로 불리게 해주마.”
“악!”
벨라가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게 되었으니까 원래대로 돌아와도 좋아. 지금 이대로가 편하다면 계속 그렇게 대답해도 되지만…”
“시, 싫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리한의 표정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이런, 이런…아직도 고약한 버르장머리가 남아있군. 진정한 육노예라면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고 대답했어야지. 중요한 것은 네 생각과 의사가 아니야. 주인님이 선택하면(Man Choose) 노예는 복종한다(Slave obey). 그렇게 가르쳤을 텐데?”
예상하지 못한 기출 변형에 낚여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사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아니, 이미 늦었어. 네년은 아직 인간으로 돌아올 자격이 없다. 그대로 팔굽혀펴기 500회. 질육의 조임이 느슨해지면 처음부터 다시다. 대답은?”
“아악!”
눈물을 흩뿌리면서 처절하게 소리를 질렀다.
집무실, 자신의 의자에서 편하게 사무를 보는 리한과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서 엎드려 뻗치고 있었던 벨라.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삽입해 있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대로 팔굽혀펴기를 수행하면서 피스톤 운동으로 주인님을 기분 좋게 만들어 드려야 했기 때문에(심지어 무장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순수한 체력만으로 수행중이다.) 이만저만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지젤의 보고를 받았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바렌탈에서 어떤 입장을 내놓았다고?”
“아, 네! 요새를 개방하되 군대는 이번 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하겠다고 합니다!”
여남작의 모습에 살짝 얼이 빠졌던 그녀가 허둥지둥 대답해 왔다.
“후후후. 항복하면 항복하는 거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군.”
“요새 사령관도 나름대로 고민해서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귀족 사회하고는 다르게 군부에서는 여전히 레스터 장군의 입김을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루크 장군이 오팔 왕국의 수호신이라면 레스터 장군은 제니아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지젤의 말대로 군부에 발휘하는 영향력은 절대적.
때문에 대세가 아무리 리한에게 기울었다고 해도 그가 래리를 위해서 맹목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이상은 적들을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뭐, 좋아. 어쨌든 피를 흘리지 않고 바렌탈을 통과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지.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해라!”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군에게 비밀리에 회견을 요청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누구지?”
“지브릴입니다.”
“지브릴…아! 투크 가문의 요수 군단을 이끄는 대장님이로군. 좋아, 만나보겠다고 전해라.”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작아. 세간에는 둘도 없는 효자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하이잘과 죽고 못 사는 원수 사이거든. 심지어 호시탐탐 가주의 자리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이지. 문제는 녀석의 야심을 하이잘도 알고 있다는 건데…그래도 만나볼 가치는 있어.”
“알겠습니다. 그러면 만날 시간과 장소를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이년이?”
짜아아악!
“하으으윽?!”
“정신 차려! 조임이 약해지고 있지 않느냐!!”
“아, 악!”
벨라가 힘차게 대답하면서 괄약근을 조이자 다시 지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다른 보고는?”
“시, 시바레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마담 로가의 설득에 진전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느리군. 이래서 제대로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어. 쓸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그리고?”
“사라 방백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오르드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우드드드득
“하윽?!”
리한의 육봉이 갑작스럽게 커지자 여남작의 교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도착했군! 후후후후. 이것으로 필요한 장기말은 모두 모였다. 남은 관문은 딱 하나…!”
쿵!
리한은 펜을 던져서 집무실 벽에 걸려 있는 지도의 스톰 가드를 명중시켰다.
“그나저나 지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요즘 들어서 점점 예뻐지고 있군. 좋은 경향이야.”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단련은 게을리하는 모양이야? 배에 새겨진 왕자가 점점 매끈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무슨?! 기, 기분 탓이시겠죠! 애초에 이렇게 두꺼운 정장을 입고 있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흥! 속이려면 귀신을 속여라. 너희가 입고 다니는 옷은 나에게는 알몸하고 다를 바가 없어. 그렇게 음란하고 칠칠맞은 몸뚱이로 감히 나를 유혹하다니. 이리로 와라! 벨라와 함께 썩어빠진 근성을 뜯어 고쳐주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근거 없는 중상모략은 흐갸아앗?!”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지젤의 배후에 나타난 그의 분신이 두툼한 허릿살을 움켜잡았다.
“이래도 시치미를 떼려고?”
“으으으으으”
“지금 당장 엎드려라, 2번 올빼미! 네년의 삐뚤어진 근성도 이 따뜻한 사랑의 고기 막대기로 뿌리부터 뜯어고쳐 주마!!”
조교 플레이에 재미를 들인 리한의 마수에 걸린 그녀는 꼼짝없이 올빼미 클럽의 두 번째 회원으로 강제로 가입 당해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집무실에서 두 명의 여성이 헐떡거리는 교성과 ‘악!’이라는 구호가 요란하게 교차하면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랭캐스터라는 악질적인 프레임에 갇힌 래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언론들은 혜성처럼 등장해서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로 연전연승을 이어나가는 리한을 침이 마르게 칭찬했으며, 거악에 맞서서 정의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광신적으로 찍어서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그들이 떠들어대는 ‘거악’의 주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