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스페셜 H이벤트. 낙월(4)
* * *
두두두두두두!
낙엽과 흙바닥을 짓이기는 요란한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무드라 데 이쉬란테 카라마!]
[메이네스. 후후후후후]
나무들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정령들의 대화.
“드라이어드를 피해서 도망치라는 게 무슨 소리냐?”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급하니까 빨리!]
벨라가 소리를 질렀지만 리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이어드가 무리를 지어서 사람을 습격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정령 중에서도 온순하기로 유명했다.
오죽 착하면 모자란 게 아니냐는 말까지 들을 정도다.
본체는 실체가 없는 아스트랄체지만 녹음이 우거진 숲에 거주하면서 식물 또는 동물로 의태하여 아름다운 숲의 여인(lady of forest)으로 살아간다.
하루종일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부지런한 일꾼들.
하지만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장소를 누군가가 훼손한다고 해서 대상에게 보복하지는 않았다.
자연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령에게 삶과 죽음, 파괴는 지극히 당연한 순리였기 때문이다.
숲이 파괴되는 것은 드라이어드에게 살아갈 장소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그 행위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으며 거주할 장소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육신을 버리고 아스트랄체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숲이 나타나면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지극히 선량하고 평화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그녀들에게 어째서 도망쳐야 하는지를 설명해라. 말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어.”
[진심이세요? 아무리 저를 믿지 못해도 그런 억지를…아악! 이미 늦었어요. 완전히 둘러싸여…버렸잖아요, 바보! 이제는…몰라요! 치지지지직 여기가 어째서…마림??이라고 불리는지…]
뚝
‘통신 방해?’
상당히 신경 쓰이는 내용을 마지막까지 말하지 못하고 마도구는 먹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휘오오오오오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180도 달라지는 주변의 분위기.
[힐리 코란테이무스]
[안코마? 나르아이나 필레]
[히아레]
[히아레, 히아레. 하하하하하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도무지 진원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를 놀리는 건가?’
정령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투만 보면 장난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덮쳐오는 기색은 없다.
하지만 환술을 사용했는지 주변 지형이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약간은 곤란한 장난.
하지만 리한은 벨라보다 드라이어드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본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놀고 싶다면 어울려주도록 하지.”
북향을 찾아낸 그는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10분.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실소를 터트렸다.
“후후후후. 좋아, 좋아.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완벽한 조난 상태.
누가 봐도 궁지에 몰려있었지만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정령이라는 것은 자연 그 자체.
그래서 마나 탐지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체인 아스트랄체는 물리 공격에 완벽한 면역을 가지고 마법 공격에도 터무니없는 높은 내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드라이어드 같은 경우는 의태를 통해서 실체를 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해서 파괴할 수 있지만, 본체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고 곧바로 새로운 의태로 육체를 재구성해버리기 때문에 기본 옵션으로 불로불사死라는 사기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맥시멈 부스트!!”
리한은 마스터 코어의 힘으로 신체 능력을 극대화시켰다.
‘아무리 드라이어드가 자연에 가까운 존재라고 해도 의태를 통해서 실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는 생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 그러면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는 않지!’
파아아아아앗!
무장의 능력과 맥시멈 부스트를 합쳐서 자신의 지각능력을 숲 전체로 확장해 나갔다.
떨어지는 낙엽, 지저귀는 새소리, 골짜기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한 줄기까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왔다.
두근
하아아아
그곳에서 아주 작고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와 가느다란 숨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거기냐!”
[들켰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
‘텔레파시?’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도망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목표를 향해서 신월보를 사용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스파아아아아아아앗!!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나무 한 그루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힘차게 끌어안았다.
뭉클
[꺄아아아♪]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부드러운 육체가 자신의 품속에 들어왔다.
게다가 사로잡을 때까지만 해도 영락없이 나무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어느새 귀여운 여성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안녕♪]
천진난만한 미소로 인사해오는 드라이어드.
“안녕…이 아니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술래잡기야♪]
“술래잡기?”
[맞아. 대단해, 대단해♪ 술래잡기에서 이렇게 빨리 잡혀본 적은 처음이야. 대부분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게 되어서 즐거운 게임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데. 후후후후후후♪]
리한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소리가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 게임 더하자!]
[더 하자, 더 하자♪]
숲 전체가 술렁거리면서 수많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아니. 술래잡기는 여기에서 끝이야. 대신 색다른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줄 테니까 그것으로 만족해줬으면 좋겠군.”
[에에에에에]
[아쉬워, 아쉬워!]
[그런데 색다른 놀이가 뭐야?]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이름이 뭐지?”
리한은 자신이 사로잡은 드라이어드를 향해서 그렇게 질문했다.
[알리카야♪]
“알리카야?”
[아니, 아니. 알리카!]
‘이름이 있군.’
야생의 정령에게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들을 다루는 술사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가리켰다.
‘정령사? 아니면 드루이드인가?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한 정령들에게 이렇게 삐뚤어진 가치관을 불어넣다니 터무니없는 자연의 친구로군.’
보통 무장이나 마법사가 되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어렵다는 것이 정령을 다루는 것이다.
왜냐면 단순하게 배우고 익히면 되는 게 아니라 천성적으로 타고난 정령친화력이 없으면 정령들에게 아예 말을 붙이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령친화력을 갈고 닦는 수련이라는 것도 상당히 골때리는 것이라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자신이 다루는 정령 특성에 동화되는 것, 드라이어드 같은 경우에는 숲에 거처하면서 식물과 나무를 가꾸는 자연인으로 살아야 그녀들과 교감이 쌓이고 친밀도가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이름까지 지어주는 사이가 되면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서 소환할 수 있게 되지만 문제는 소비하는 마나가 많아도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냐면 B급 무장 수준의 마나 보유량을 가지고 있어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그것도 정령이 발휘할 수 있는 본래 힘에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정령 자체가 워낙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5~6서클 마법에 해당하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소환 대비 마나 효율이 나빠도 지나치게 나빠서 정령사의 진가가 발휘되는 장소는 지극히 국한되어 있다.
바로 지금처럼.
“누가 너에게 알리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
[대나무야♪]
이 대답에 리한의 표정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벨라 녀석.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또다시 나를 속였군. 마림??은 뭐가 마림??이라는 거냐???’
3번째 스테이지 보스의 정체는 정령사였다.
그리고 이 숲은 그녀의 에어리어.
정령사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은 친밀도가 높아진 정령들이 머무르는 장소로 그녀들을[소환]하지 않아도[부탁]만으로도 조종할 수 있는 영역을 말한다.
그 증거로 이 짓궂은 술래잡기에 동참한 드라이어드는 모두 그녀의 친구다.
대나무는 이 지역에서만큼은 세계 최강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선량한 드라이어드에게 아무 명령이나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술래잡기라는 이상한 방식을 채택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아마도 원래 계획은 자신을 드라이어드가 만든 미궁 속에 가둬놓고 시간 초과로 패배시키거나, 아니면 백기를 들고 항복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벨라와 대나무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리한의 종족인 더 원이 이 세상 모든 정령과 말도 안 되는 친화력을 가지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정령사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그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잠자는 소질을 건드려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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