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H이벤트 포함)결전전야 하편(1)
* * *
데스투도(지상성벽)의 역할은 단순하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고기 방패.
기병대의 돌진, 무투기, 전략, 전술 마법과 같은 공격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적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켜 지치게 한다.
아무리 고강한 무장과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마나는 무한하지 않은 법.
데스투도를 악전고투하며 돌파한 적들을 온존해놓은 비대칭 전력으로 마무리하는 게 지상전의 정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지반 붕괴로 사각형 방진 한쪽 테두리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숲에서 뛰쳐나오며 그곳을 노리는 기병대의 돌진.
“구, 궁수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쏴라, 쏴라!!!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추, 충?!!!”
노리스가 전열 붕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사격 명령을 내리자 궁수들이 허둥지둥 활을 겨냥하고 시위를 당겼다.
슈슈슈슈슈슈슝!
밤하늘에 붉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수백, 수천의 화살.
거기에 마법사들의 공격이 더해져서 화력은 배가되었다.
“맞받아쳐라!!”
“충?!!!”
기병들을 보호하는 실드 마법이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아토스의 뒤를 따르는 붉은 전마단이 석궁 쿼렐을 장전하여 적진으로 쏘아 올렸다.
리한이 기병 전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서 고용한 용병단.
라켈 대초원을 누비는 전사들의 피가 흐르는 후예들로 하나같이 마상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프로중의 프로였지만, 단순하게 기병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되어 지명도가 떨어졌던 그들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퓨퓨퓨퓨퓨퓨퓩!
“크아아아아아아악?!”
공수 교환의 성과는 거의 일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이 실드 마법과 갑옷, 방패에 부딪혀서 튕겨 나간 균터 가문 궁수들의 공격에 반해서 붉은 전마단의 석궁 공격은 고스란히 상대 방어를 뚫고 들어가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뭐라고?!!”
순식간에 백여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자 당황하는 노리스.
“하하하하하하하! 맛이 어떠냐? 더러운 귀족 새끼들아!! 이게 바로 몬스터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개방한 우리들의 캐스미랄 2호다!”
“혀, 형님! 부끄러우니까 그 이름은 사용하지 말라니까요?!”
털북숭이 사내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아토스에게 전령 역할을 했던 노움 소년이 안절부절못하며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장사 도구는 널리 널리 선전해야지!! 붉은 전마단입니다, 귀족 여러분! 캐스미랄 2호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하셨다면 앞으로는 우리 붉은 전마단의 서비스를 이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오늘의 적은 내일의 고용주. 철두철미한 비즈니스 마케팅 정신…동경해!!”
“그런데 이랬다가는 용병왕님이나 후계자 전하의 눈 밖에 나버리는 거 아니야?”
“?!! 그, 그러면 안 되지!! 죽어라 더러운 귀족 녀석들!!!”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가 없는 용병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아토스였지만 그들을 고용한 리한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대량의 마나를 소비하는 전술 마법으로 지친 마법사들을 대신해서 충분한 원거리 화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병 전력을 대폭으로 증가시켜주는 핵심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기고만장한 귀족들에게는 충분히 본때를 보여줄 만한 실력.
비록, 캐스미랄 2호의 위력으로 금강투합체를 뚫을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일반 병사들의 막대한 희생은 적들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적진은 이제 코앞에 있다.
균열의 넓이는 4~5m.
하지만 미스릴 갑주를 착용하고 있는 군마들이라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다.
“호플리테스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팔랑크스 대형을 갖춰라! 빨리, 빨리!!”
“충?!!!”
챙챙챙챙챙챙!
노리스의 다급한 외침에 경무장 보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전개하며 기다란 장창을 겨누어 왔다.
전개 속도가 느린 중무장 보병들을 불러들일 시간은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땅속으로 추락한 데스투도의 백업을 담당하는 호플리테스를 앞세워서 새로운 장벽을 세웠지만 백업은 그저 백업일 뿐.
쿠오오오오오오오오!!
선두에서 돌진해 오는 아토스와 팔콘전사들을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며 공간 전체를 일그러트렸다.
우드드드드득!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팔뚝이 소매를 찣으며 튀어져 나와서 기괴할 정도로 힘차게 꿈틀거리는 근육을 과시해 왔다.
무투기 사용을 위한 준비 동작.
두두두두두두두두두
흙먼지를 튀어 날리며 자신들을 향해서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기병대의 돌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꿀꺽
“아, 안 돼…”
긴장해서 부르르 떨며 땀을 흘리고 있던 호플리테스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창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쏟아지는 무투기의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무투기. 수왕참!!!!”
투콰아앙아아아아앙!!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었다.
호플리테스가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은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산산조각으로 분쇄되어 날아가는 자신들의 육체의 파편.
그것도 뇌가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면 그저 망막에 스치듯이 새겨지는 잔상에 불과한 것이다.
순식간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지며 적의 본대를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위력은 노리스의 안색을 창백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우리보다 강하다!!’
승패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무장과 마법사들의 토탈 전투력으로 가려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본능이 격렬하게 경고성을 발하고 있었다.
기병대라고 얕잡아봤던 적의 무장 구성이 자신들을 작정하고 때려잡으려는 아스트라세 가문의 주력 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호, 호플리테스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중무장 보병들도 꾸물거리지 말고 데스투도를 회수해라! 적들을 막아라, 막아!!!”
“추, 충?!!!”
남은 방법은 병력 숫자가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십분 활용해서 적의 주요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무투기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균터 가문의 본진으로 들어온 적의 숫자는 아직 1천 이하.
1차로 돌격부터 시작해서 2차, 3차, 4차로 진형을 나눠서 돌입해 들어오는 것이 정석적인 기병의 운용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2차 웨이브가 몰려오는 상황.
지금이라도 방진을 풀고 적의 주력을 소모시키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이번에도 훼방을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붉은 전마대였다.
“이제부터는 맡겨주십시오, 용병왕님!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승리를 위한 글로리 로드를 열어드리겠습니다!!!”
“좋아,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충?!! 들었지? 새끼들아!! 이제야 간신히 밥값할 시간이니까 무거운 궁둥이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여기에서 뒤지는 한심한 새끼들의 사망 수당은 나 혼자 모조리 꿀꺽해버릴 테니까 니들 목숨은 니들이 챙겨!!!”
“단장 새끼, 인성 보소?!!”
“하극상이다! 뒤에서 쏴 죽여!! 저 새끼 죽이고 나도 한번 용병대장이 되어보는 거야!!”
“무얏호!!”
“…”
가지 각기 정신 나간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돌진해 들어가는 붉은 전마단이지만 입담이 저렴하다고 해서 전투력까지 저렴한 것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용병 새끼들! 막아, 막아!!”
“하하하하하! 어제까지 땅에서 농사나 짓던 새끼들을 데려다 놓고 평생 칼밥으로 먹고 살아온 우리들을 당해내겠다고???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봐라!!!”
퍼퍼퍼퍼퍼퍼퍼펑!!
고슴도치처럼 빼곡한 팔랑크스를 전개하는 균터 가문의 호플리테스를 향해서 캐스미랄 2호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하지만 이번에 날아드는 것은 석궁 쿼렐이 아니다.
조그마한 쇠공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고 생각한 순간에 성대하게 폭발.
“끄아아아아아악?!!”
눈부신 섬광이 호플리테스의 시야를 멀게 하면서 팔랑크스 진형이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어지럽혀지는 창과 방패.
그리고 붉은 전마단의 돌격이 무력화된 적들을 덮쳤다.
“데스 클로!!!”
퍼퍼퍼퍼퍼펑!
무투기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마상 전투에 특화된 용병들이다.
창끝에 맺히는 선명한 창기가 적의 방패와 갑옷을 뚫고 들어가면서 살을 찢고 뼈를 부수며 치명상을 입혔다.
순식간에 대열 하나를 돌파해서 다음 대열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하는 붉은 전마단.
하지만 승리에 쐐기를 박아넣은 것은 그들의 활약이 아니었다.
쿵!!!!!!
다시 한번 지면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굉음이 분지 전체를 세차게 들썩거리게 했다.
“서, 설마 이건…”
잊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균터 가문의 병사들을 잠식해 왔다.
밟고 있는 지면이 언제 어디서부터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공포.
그것은 불리한 전황에 남은 용기를 쥐어 짜내서 간신히 적에게 맞서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