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 (H이벤트 포함)결전전야 상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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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에게 제니아 최고의 미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빙면설화 이리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신붓감을 물어보면 의견이 분분해진다.
그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문마다 원하는 배우자와 조건이 그만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계자의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기준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일반적으로 남자나 여자에 상관없이 무조건 고분고분하며 순종적인 조강지처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유는 기가 센 배우자에게 가문이 휘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젤다는 최고의 신붓감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당했던 그녀는 오로지 정략결혼을 위해서 철저하게 남존여비 사상을 교육받으며 성장해 왔다.
남편(또는 아버지)은 하늘이며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
남자 앞으로 나서지 마라, 언제나 한 걸음 떨어져서 다소곳이 걸으며 경망스럽게 발소리를 내지 마라.
남편의 잘못은 아내의 부덕, 내조가 부족한 것이니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해서 고쳐라, 등등등.
요즘 같은 세상에 제정신이냐고 물어볼 만한 교육을 당연하다는 것처럼 주입받으면서 자랐고, 김나지움에서까지 1타 강사가 철저하게 따라붙어서 세뇌에 가까운 삐뚤어진 가치관이 몸과 정신에 완전히 정착해버리고 말았다.
남자의 일그러진 환상을 모조리 집합시켜놓은 것 같은 완벽한 규중소녀가 탄생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배우자를 원하는 귀족들이 왕국 전체에 넘쳐난다는 것이다.
혼담 제의가 들어온 횟수만 놓고 본다면 이리나의 5배 이상.
오랫동안 유지해온 결혼동맹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공동경매에 부쳐서 가장 높은 지참금을 제시하는 가문에게 상품처럼 팔려나갔을 것이다.
‘동맹에게 파는 것도 아까워서 결국에는 결혼 사기를 쳐버렸지만 말이지.’
아카이아시의 라독 가문, 앵거스의 록우드 가문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호커빌은 전임 가주의 장례식을 마치기가 무섭게 약식으로 영주 취임식을 진행했으며 이제부터 베어루스 가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영지에 알렸다.
이어서 동맹을 이탈한 버건디 가문까지 후계자군에 합류.
그 모든 과정이 선전포고 후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들이다.
다섯 남작 중에서 남은 세력은 이제 둘, 케테누스령을 다스리는 균터 가문과 잔스시를 지배하는 안돌할 가문밖에 없었다.
이 중에 균터 가문은 버건디 가문의 트로예 남작에게는 철천지원수.
[다른 은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균터 일가를 반드시 제 손으로 몰살하게 해주십시오.]
당연하지만 일가의 범주에는 그리젤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더러운 오물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가문에 흑역사를 새겨놓은 원흉을 모조리 제거해버리겠다는 지극히 귀족다운 심보.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잔인한 학살을 용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너희 가문의 실추된 명예는 책임지고 회복시켜주지. 균터 가문의 가주 오스왈드는 현재 랭캐스터와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 처분과 심판을 너에게 맡기마. 동시에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너희들이 입은 손해의 두 배 이상을 보상해주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분에 넘치는군요.]
[물론이지, 당연하지만 이것은 공짜가 아니다. 너희 가문은 박쥐처럼 대세를 따라서 우리군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니 워하는 보상을 쟁취하고 싶다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해서 충성심을 증명해 보여라. 성과에 따라서 걸맞은 포상을 내려주마!]
[물론입니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트로예 남작은 이 조건에 만족하면서 돌아갔고 곧바로 군대를 일으켜서 케테누스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리한의 그리폰 부대하고는 별도로 출발한 아토스와 나디아 남매가 이끄는 용병 + 아스트라세 가문의 1만 기병대가 다른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여기에 반란이 일어나서 그들과 호응하는 바람에 균터 가문은 순식간에 사면초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동맹인 벨라 안돌할 여남작은 패색이 짙어지자 구원 요청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자신의 근거지인 잔스시에 틀어박혀 버렸다.
겁을 먹은 오스왈드는 직접 그리폰을 타고 바렌탈 요새까지 날아가서 사령관에게 충성파(군부)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때까지도 래리가 랭캐스터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내부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런 확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것으로 균터 가문의 멸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금 과장하면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차이.
이런 주변 상황에 제멋대로 휘둘리는 그리젤다의 처지도 참으로 딱하고 기구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불과 19세의 나이로 처가와 친가가 몰락하고 남편까지 죽어서 미망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슬하에는 자식도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남자 경험조차 없었다고 한다.
“…실화냐?”
“실화입니다.”
기가 막혀서 중얼거리는 리한에게 그리젤다가 공손하게 대답해 왔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났는데 손을 대지 않았다고?”
“첫날밤을 치렀습니다만…서방님께서는 그…곤란하셨던 모양인지라.”
발기 부전.
서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까 학창시절의 그리젤다는 외모면 외모, 성적이면 성적, 교우 관계까지 모든 면에서 카스트 상위 계급에 위치해 있었지. 이상한 사상과 가치관을 주입받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요아힘보다 뛰어난 완벽한 모범생. 인싸중에 인싸였으니까 말이야. 녀석이 주눅 들어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군.’
“남편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느냐?”
“사이가 좋거나 나쁘다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해 왔다.
“…질문을 잘못했군. 평소에 남편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었느냐?”
“지극히 짧았습니다. 어쩌다 마주치면‘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고 외치며 떠나버리시는 바람에 제 표정과 눈빛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습니다만…후계자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순진한 갈색 눈동자로 올려보면서 질문해 왔다.
주먹처럼 조그마한 얼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
정갈한 상복 차림에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과부가 되기에는 미래가 지나치게 창창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쬭
리한은 질문에 키스로 대답을 해줬다.
“꺅!?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 미망인에게 손을 대시다니 점잖지 못하십니다!!”
“…미망인이 아니다.”
“네???”
“오늘 이 시간부로 너를 내 첩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호커빌하고도 이야기를 끝냈어. 좋은 사람이더군. 네 처지에 공감하고 선처를 베풀었으니까 말이야.”
“하, 하지만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야…식을 올리기 위해서는 합당한 절차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오스왈드 남작에게는 이제 그럴 권한이 없다. 그는 랭캐스터 신분으로 추락했어. 게다가 너는 출가외인이 아니냐? 록우드 가문은 멸망했고 남편도 죽었으니 신병의 소유권이 호커빌에게 넘어갔다가 나에게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네가 너의 남편이며 아버지라고 할 수가 있겠지.”
“그, 그럴 수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느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동요하면서 허둥대던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난 후에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으면서 입을 열었다.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이제부터 후계자님께서 저의 주인님, 아니. 서방님이 되어주셨다는 말씀이로군요.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솔직히 이제 출가해서 수녀원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부족한 신첩을 받아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게 끝이냐? 겨우 이런 설명으로 납득했다고???”
리한은 기가 막혀서 되물어보았다.
“그렇습니다만…신첩이 뭐가 잘못한 것입니까?”
“아니. 보통이라면 조금 더 상황을 의심하고 부정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설마요? 후계자님은 남성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남성의 표본이며 만백성의 귀감이고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어찌 하찮은 여인에 불과한 신첩이 감히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이쯤 되면 무서울 정도야. 어떤 면에서는 오리나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군…”
“역시 신첩이 뭐가 실례를…하윽?!”
가슴을 붙잡히는 바람에 가냘픈 신음을 토해내었다.
“후계자님?”
“지금 이 자리에서 첫날밤을 치르도록 하겠다. 불만은 없겠지?”
“무, 물론입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야…흥크으으읏?!”
리한은 그녀를 번쩍 안아서 침대에 눕혀버렸다.
“입고 있어라. 상복 차림으로 범하는 것이 흥분되니까 말이야. 그리고 깜짝 게스트도 초대했다. 거기에 있는 줄을 잡아당겨라.”
“게, 게스트라니 누가 지켜보는 겁니까?”
“불만이냐?”
“아닙니다!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에잇!”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거스르지 못하고 따르는 그리젤다였지만 줄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한쪽 벽면을 가리고 있었던 장막이 떨어져 내리면서 묶여있는 인물이 나타나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헤, 헤스티야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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