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H이벤트 포함)결전전야 상편(1)
* * *
카스는 그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처음부터 전황이 불리해지면 이럴 작정이었느냐?!”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소.”
“어떻게 감히! 트로예 남작은 정말로 그까짓 파혼 문제 때문에 3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동맹을 배신한다는 것인가?!”
챙!
“한 번만 더 주군을 모욕했다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베어버리겠소! 게다가 그까짓 파혼이라고? 그까짓 파혼 때문에 당신들이 저지른 만행은 잊어버렸다는 말이오?!”
“아니 그건…”
사건 당시.
균터 가문에게 뒤통수를 맞은 트로예 남작은 지독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지참금 반환 + 위자료 + 진정 어린 사과를 요구했다.
거절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
하지만 이것은 중립을 지켜야 하는 동맹 전체의 개입으로 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3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동맹의 화합과 평화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나머지 세 남작이 노골적으로 균터 가문을 편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카슨 남작이야 결혼 경쟁에서 승리하고 따끈따끈한 사돈 관계를 맺었으니 그럴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두 가문이 어째서 그랬냐는 것.
아니나 다를까 지참금 일부를 뇌물로 건네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사실상 동맹 전체가 짜고 버건디 가문의 뒤통수를 쳐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트로예 남작이 입은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부도 빼앗기고 지참금 + 위자료도 돌려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재의 결과물이랍시고 사과 같지도 않은 4과 몇 줄을 적은 편지 한 장을 받은 것이 전부.
게다가 이 소식이 사교계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버리면서 귀족 사회의 웃음과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자존심과 체면을 무참하게 짓밟혀버린 것이다.
“우리 버건디 가문은 동맹에 대한 의리를 충분하고 넘치게 지켰소! 그대들처럼 파렴치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아까울 정도지.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주군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시오!!”
“아니다, 아니야! 진정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라! 다른 가문은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정말로 트로예 남작을 동정해서…”
이 말을 들은 크랑이 코웃음을 쳤다.
“동정? 동정이라고? 하! 마지막까지 현실 인식을 못 하고 망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랭캐스터로군.”
“뭐, 뭐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멸칭??.
머리가 띵했지만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계속해서 조롱이 이어졌다.
“내 말이 틀렸소? 동맹에는 이제 제대로 된 마법사 부대도 그리폰 라이더도 없지 않소? 충성파에게 버려져서 궁지에 몰린 자들이 감히 누구를 동정한다고 지껄이시는 것이오?”
“큭!”
“보병, 궁병, 기병…하하하하! 솔직히 그런 병종 구성은 역사책에서나 봤는데 말이오. 아니, 아니지. 어쩌면 대륙 오지의 어딘가에는 그런 야만족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군. 수치도 모르고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미개한 원시인들이 말이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크랑의 외침에 버건디 가문의 라이더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부르르르르
“크으으윽! 네놈들이 감히 나를 우롱하다니…”
수염을 파들파들 떨면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카슨이 자신의 언월도를 움켜잡았지만 곁에 있는 측근들이 잽싸게 뜯어말렸다.
“고정하십시오, 주군! 저들은 지금 싸울 핑계를 만들려고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겁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산시아 성으로 퇴각해서 군대를 재정비해야 합니다. 후계자인 요아힘 도련님을 위해서라도 훗날을 기약해주십시오!”
“요, 요아힘!”
반쯤 이성을 잃어버렸던 그는 자식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측근들의 말대로 이번 전투는 가망이 없었다.
동맹군은 아스트라세 가문의 매서운 파상공세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버렸고 전의를 상실한 라이더들은 무기를 버리고 속속들이 투항하고 있다.
헤스티야마저 포로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최소한의 전열 유지조차 불가능해진 상태.
“퇴각 나팔을 불어라! 최대한 많은 병력을 온존해서 돌아가야 한다!!”
부우우우우우우우!!
늦어도 너무 늦은 명령이었지만 일부가 신호에 호응해서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추격하시겠습니까?”
루돌프의 질문을 들은 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리 압승이라고 해도 우리 군도 지쳤다. 이대로 아카이아로 돌아가서 한숨 돌리도록 하지. 게다가 자중지란으로 알아서 무너질 녀석들에게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이 말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게 실현이 되었다.
잠시 후, 전략 규모의 통신 방해가 해제되는 것과 동시에 후계자군의 대승을 알리는 승전보가 제니아 전체로 퍼져나갔다.
600대 1200의 싸움.
무장의 실력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정면으로 맞붙었다면 동맹군이 무난하게 승리를 차지할 거라고 예측되는 싸움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후계자군은 팔콘 전사 15명이 전사했고 24마리의 그리폰이 죽었다.
부상자는 이보다 2배가 많았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전투에 복귀할 수 있는 가벼운 상처에 불과했고 마법사들의 피해는 제로. 한 명이 지상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마나가 떨어져 1층 반 높이에서 추락해 발목을 삔 것이 전부였다.
반면에 동맹군이 입은 피해는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것이었다.
“겨우…겨우 이것밖에 남지 않은 것인가?”
열다섯.
그것이 카슨 곁에 남아있는 라이더들의 숫자였다.
전투에서 사망한 자들, 부상 때문에 뒤처지거나 남겨진 자들, 적에게 항복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 혼비백산해서 아예 엉뚱한 방향으로 도망쳐버린 자들도 있었고 따라오다가 슬그머니 탈주해서 줄행랑을 쳐버린 자들도 있었다.
역사에 기록될만한 패전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말로는 처참했다.
쏴아아아아아아
산시아 성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기진맥진한 상태로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그들은 어서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에 착륙을 서둘렀지만, 활주로에는 이상하게도 자신들을 마중 나와야 하는 종자와 사육사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해링턴! 해링턴은 어디에 있느냐?!”
펑! 펑! 퍼퍼퍼퍼퍼펑!
호통을 치는 것과 동시에 눈부신 조명 세례가 남작 일행을 덮쳤다.
카오오오오오오!!
“무, 무엄한 녀석들! 이게 지금 무슨 수작이냐?!”
뚜벅뚜벅.
“정말로 처참하게 패배하셨군요, 주군. 솔직히 적이 흘린 가짜 뉴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사하게 돌아오신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놓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해링턴! 다행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불부터 꺼라. 지금 장난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어서 성의 수비를 강화하고 다음 대책을 강구해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군. 신에게 후계자군을 막을 수 있는 완벽한 계책이 있습니다.”
“오오오오! 그게 정말이냐?!”
반색하는 카슨을 향해서 그는 두 개의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화평을 요청하겠습니다. 딱 두 가지만 넘겨주면 될 것 같더군요.”
“두 가지라고?”
“네! 하나가 무엇인지는 지금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후우우우웅!
그렇게 외치면서 수박 크기만 한 물건 하나를 발치로 집어 던졌다.
툭! 데구르르르르르
보자기로 지나치게 허술하게 묶어버린 나머지 내용물도 너무 쉽게 바깥으로 굴러 나와버리고 말았다.
“…”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잠겨버리는 정적.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처럼 카슨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려버리고 말았다.
“…요아힘?”
모든 힘이 빠져나간 것처럼 무기력한 음성.
“정말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주군. 분노한 민중과 후계자님을 달래기 위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랭캐스터 하나만으로는 계산이 부족했으니까 말입니다!”
“네 이노오오오옴!!”
“감히 주군을 배신하다니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흥! 패배자들이 잘도 지껄이는구나. 전군 공격! 그리폰 라이더라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력이 떨어진 녀석들은 일반인들하고 다를 바가 없다, 랭캐스터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상금으로 200대륙 은화를 하사하겠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슈슈슈슈슈슈슉!!
성주의 외침에 고무된 병사들이 활을 쏘고 창을 겨누며 달려들어 왔다.
거기에 배신한 무장들과 마법사들까지 합세해서 공격을 퍼부어대자 순식간에 열세에 몰려버리는 라이더들.
“주군, 전세가 불리합니다! 여기는 저희가 목숨을 걸고 막을 테니 지체하지 말고 빠져나가십시오!!”
그리폰 시체를 방패막이로 화살을 막아낸 측근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카슨은 혼이 빠진 표정으로 멍청하게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빠져나가…? 내가 아들을 두고 어디로 떠난다는 것이냐?”
“주군!”
“걱정하지 마라, 요아힘. 너를 차가운 저승에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야. 아빠가 곧 가마. 그래…어린 시절처럼. 오랜만에 부자 함께 오붓하게 낚시라도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주군!!!!!!!”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