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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화 〉 질풍가도(4) (284/429)

〈 284화 〉 질풍가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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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잘이 의심한 것처럼 콜라가 폭주를 일으킨 이유는 블러드 디자이어 때문이었다.

끌어 오르는 피의 폭주를 주체하지 못하고 환상에 사로잡혀서 춤을 추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마리오네트.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전쟁범죄자이기에 불쌍하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랭캐스터는 정말로 지독한 녀석들이로군요. 설마 충성파에 저렇게 흉악한 자들이 암약하고 있었을 줄이야.”

자초지종을 모르는 루돌프가 리한의 곁에서 그런 말을 해왔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그가 상당히 믿을 수 있는 측근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진실을 가르쳐줄 정도로 신뢰하는 것도 아니다.

아스트라세 가문의 충성은 자신이 리한 폰 아슈킬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두는 것.

종말의 마수라고 불리는 더 원 퍼스트 선의 자아가 그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가는, 자신의 여자인 이리나조차 후계자에게 기생하는 괴물 정도로 취급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떼어내려고 할 것이었다.

‘정작 나 자신조차 스스로가 퍼스트 선인지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인지 헷갈릴 지경이지만 말이야.’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은 과거에 지배당하는 동물이고 그것은 더 원도 마찬가지.

후계자의 기억을 공유한 순간부터 두 사람의 자아는 합쳐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과거와 달라졌다고 해도 현재의 자신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스스로의 의지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리한은 후계자의 과거를 수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여러모로 놀랐습니다. 도련님이 갑자기 제 눈앞에서 둘로 분열해 아카이아를 해방하자고 말씀하셨을 때는 악마에게 홀린 줄 알았으니까요.”

“덕분에 양쪽 모두 최고의 결과를 얻지 않았느냐?”

“정말로 그렇습니다.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300밖에 되지 않는 그리폰 라이더로 5천의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들었을 때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도련님의 대담무쌍한 작전이 그렇게 완벽하게 먹혀들어 갈 줄은 몰랐으니까요.”

구스타프 남작은 아스트라세 가문의 공격을 대비해서 아카이아에 대규모 마법사 요격 부대를 편성해 두고 있었다.

그런 편제의 장점은 전술 규모의 마법 대결에서 우세를 점하기 좋다는 것.

색적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뒤통수를 맞기 어려운 데다가, 여차하면 대규모 전이 마법으로 지원군을 불러올 수도 있고 무엇보다 하늘을 나는 그리폰 라이더를 지상에서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요격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한은 그런 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적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을 세웠다.

이름하여 메테오 샤워.

그리폰들에게 커다란 돌을 짊어지게 하고서 적의 색적 마법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상공을 비행해서 날아가, 적의 마법사 부대의 머리 위로 돌과 함께 무장들을 태워서 떨어트린다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마법사들의 탐지마법은 기본적으로 마나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 지물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 위로 기척을 숨긴 팔콘 전사들이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

누군가가 하늘을 올려다봐서 이변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메모라이즈 마법조차 발동하지 못할 정도로 메테오 샤워가 가까워져 있었다.

위치에너지가 더해진 엄청난 충격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 있는 마법사들에게, 충돌 직전에 뛰어내린 무장들의 공격은 양 떼 무리에 늑대들을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배틀 메이지를 제외하면 근접전에 취약한 것이 마법사들의 슬픈 현실이다.

학살과 시가지 통제에 정신이 팔렸던 남작군이 뒤늦게 알람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달려왔을 때는 이미 대다수가 백기를 올리고 투항해버린 상태였다.

지상은 팔콘 전사들에게, 그와 별도로 루돌프와 리한이 지휘하는 300의 그리폰 라이더가 아카이아의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모습에 그들을 싸울 전의를 잃어버리고 백기를 들어 올렸다.

전투 결과를 살펴보면 피해는 양측 모두가 놀랄 정도로 적었다.

남작군의 전체 사상자는 800명.

반면에 아스트라세 가문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기선을 제압했다고 해도 전의를 상실한 적들이 빠르게 투항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면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사에 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도련님의 수완도 수완이지만 이번 전투에서 보여주신 무공 수위. 설마 벽을 넘으신 겁니까?”

“청문회가 따로 없군. 시시콜콜 이야기해줘야 하는 것이냐?”

“하하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성장한 도련님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로 흐뭇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도련님이 아니라 주군으로 불러드려야 하겠군요.”

“됐어. 사석에서까지 그렇게 피곤하게 예의를 따지고 싶지는 않아.”

리한이 질색이라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자 루돌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측근에게 신호를 보냈다.

천으로 감싼 물건을 건네받고서 무릎을 꿇으며 내밀어 보였다.

“그러시다면 하다못해 이것만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웬 것이냐?”

“도련님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스르르르륵­

천을 풀어헤치자 두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태극을 상징하는 것처럼 흰색과 검은색으로 쌍벽을 이루는 병기.

휘어진 칼날이 검?이라기보다는 도?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무공에 맞춰서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훌륭한 무기는 언제나 남자를 설레게 하는 법.

리한은 곧바로 쌍검을 들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무게중심이 완벽하군. 매끄러운 표면 처리에서 장인의 소름 끼치는 고집이 느껴질 정도야. 예리함만으로도 상대를 베어 넘길 수 있는 귀기가 느껴져. 정말로 훌륭해! 보아하니 짧을 시일에 준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필시 명장 중에서도 명장의 작품이겠지?”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말씀하신 대로 대륙 최고의 명공으로 이름이 높은 피터 존슨의 작품입니다.”

“1년에 하나의 작품밖에 만들지 않는다는 괴짜가 아니냐?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하지 않고 가족의 애원에도 젓가락 하나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괴팍한 양반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라. 설득하는 데 얼마나 걸렸지?”

“…5년입니다.”

“…”

먼 산을 쳐다보면서 말하는 루돌프의 모습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애환이 느껴져 왔다.

“원래는 도련님께서 가주로 취임하시는 날에 드리려고 했습니다. 예정하고는 조금 달라졌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지금 건네드리는 것이 옳겠죠. 손잡이를 도련님의 사이즈에 맞춰서 교체했습니다. 덕분에 첫 출정에 맞추지 못하고 살짝 늦어버리고 말았군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다. 아스트라세 가문의 헌신에 어떻게 보답해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미 충분히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

리한은 솔직하게 감동했다.

비록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기라고 할지라도 장인의 기술과 혼이 실린 작품이라는 것은 어떤 예술품보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물론, 빛 좋은 개살구라면 의미가 없을 테지만 이 경우는 실용성 또한 압도적.

“순수한 마나타이트로 제작한 무기입니다. 어떤 공정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출력을 1.5배까지 증폭시켜준다고 하더군요.”

“대륙 전체에서 2~30위권 안으로 들어가는 병기라는 소리군. 이거 하나 때문에 타국하고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성능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숨겨주십시오. 입단속만 제대로 시키면 어떻게든 속여넘길 수가 있을 겁니다.”

“흥,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느냐? 이런 비밀이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지. 이렇게 부담스러운 선물을 주다니 네가 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두려우시다면 그 검으로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해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 그렇다면 제일 먼저 네놈의 목부터 쳐버려야 하겠구나!!”

시답잖으면서도 살벌한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훌륭한 무기에는 자고로 이름이 있어야 하는 법이죠. 이제 신병이기의 주인이 되셨으니 그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않아도 생각해놓은 이름이 있다.”

“무엇입니까?”

“예전에 루크 대장군에게 무공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지. 그 늙은이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더구나? 아슈킬 가문의 가주가 대대로 수련해 온 월환쌍극은 반쪽짜리 미완성 무공이라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솔직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나도 마찬가지야. 그 늙은이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한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일천월환쌍극진경. 그것이 천년 가문이 전승해나가야 하는 진짜 무공이라고 들었다.”

“일천월환쌍극진경…그, 그것참 공교롭군요.”

“왜 그렇지?”

“피터 존슨에게 무기 제작을 의뢰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원래는 두 자루 모두 검은색으로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만,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에게 어울리는 무기는 흑과 백이 완전한 조화를 이뤄야 의미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건 운명일지도 모르겠군.”

챙!

리한은 밝게 빛나는 햇살을 양단하듯이 두 자루의 검을 들어 올렸다.

“일극과 월극. 그것이 쌍둥이 남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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