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질풍가도(3)
* * *
“…정말로 소름 끼치는 녀석이구나! 민심을 휘어잡는 법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어. 이 전쟁은 졌다, 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야!”
인터뷰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하이잘이 한숨을 내쉬며 장탄했다.
“너무 비관적으로 전망하지 마십시오. 전세는 우리가 유리합니다. 압도적으로!”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구멍 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설마 후계자에게 귀순할 생각입니까?”
“진영을 다시 고를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구나. 하지만 나는 충성파에 너무 깊게 발을 담가버리고 말았어. 이제 와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단언하면서 지팡이를 디디고 일어섰다.
“지브릴!”
“네, 아버님.”
병풍처럼 조용히 서 있다가 대답하는 남자.
“너는 지금 당장 2만의 요수병단을 이끌고 바렌탈로 향해라!”
“…바렌탈입니까?”
“그래, 무슨 불만이라도 있느냐?”
“불만은 없습니다만 전선에서 너무 떨어진 후방이 아닙니까? 다섯 남작 동맹을 지원하려면 잔스 시로 향하는 것이 낫지 않을지…”
“누가 다섯 남작 동맹을 도우라고 했지?”
“하지만…”
“에잉, 쯧쯧쯧. 너희 둘 다 위기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지금 다섯 남작 동맹을 지원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야. 10만, 20만을 동원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어. 바렌탈조차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설마…아무리 그래도 제니아 최대의 군사 요새도시가 아닙니까?”
“멍청한 놈! 이러쿵저러쿵 지껄이지 말고 명령에 복종해라. 현장에 도착하면 싫어도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게다. 상황이 위험해지면 주저하지 말고 군대를 퇴각시켜라! 그 정도 눈치도 없다면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리는 편이 우리 가문에 도움이 될 테지.”
“아, 알겠습니다!”
하이잘의 일갈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거수경례로 응답했다.
“나는 한발 먼저 스톰 가드로 향하겠다. 에스메랄다! 너는 이곳에 남아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준비를 마치는 대로 뒤따라 오거라!”
“재정비라면…?”
“이번 전쟁에 참여할 의사가 없는 자들을 솎아내라는 소리다! 만에 하나라도 후계자에게 선동당해서 군대의 기강을 흐트러트리는 녀석이 있다면 본보기로 목을 베어버려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서 데리고 오거라!”
‘싸울 수 있는 상태라고?’
“알겠습니다!”
방을 나서는 노인에게 직립 부동자세로 나란히 경례한 두 사람은 슬그머니 서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아무래도 꼰대의 똥줄이 타들어 가는 모양인데? 누나. ”
“…누나라고 부르지 마라.”
능글거리는 지브릴에게 에스메랄다가 으르렁거렸다.
“뭐가 어때서 그래? 이복동생이라고 해도 남매는 남매잖아? 귀여운 남동생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귀여운 동생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속이 시커먼 새끼가…”
“알았어, 알았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으면 이번에는 비즈니스 이야기나 하자고. 슬슬 마음은 정했어?”
“거절하겠다고 말했을 텐데?”
“…정말로 고집불통이네. 만약에 이번 전쟁이 꼰대의 예측대로 암울하게 전개된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저 빌어먹을 꼰대를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할 거야?”
“…”
그녀는 인상을 쓰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네. 오늘 내려진 명령만 봐도 투크 가문의 군대는 이미 누나가 장악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어째서 그렇게까지 꼰대를 무서워하는 거야?”
“…벌써 몇 번이나 대답했잖아. 어머니가 인질로 붙잡혀 있다고!”
“그래, 그래. 정말로 눈물 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 숲의 거인족 최고의 미녀라고 소문이 자자한 아만다 님께서 변태 노인네의 성 노리개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으니까 말이야! 듣자 하니까 질문이 하도 커서 사람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 지경이라는데 꼰대가 누나를 어떻게 임신시켰는지 모르겠…커헉!”
쿵!!!
지브릴의 머리가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혀서 바닥에 찍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개자식이 감히 우리 어머니를 모욕해?!”
“크으으으윽. 하하! 이제야 하프 자이언트의 성질이 나오네! 쿨럭, 그런데 그거 알아? 누나는 어머니가 살아있기라도 하시지. 우리 어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단순하게 꼴린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나가 알아?!!”
“큭…”
처절한 절규에 자신도 모르게 억누르는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누나의 힘이 필요해. 솔직히 우리가 가족다운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동생의 마지막 부탁이야…”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쉬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안 돼. 그리고…아무리 불쌍한 척을 해도 안 속아.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대도 결국에는 네가 투크 가문의 가주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쳇, 들켜버렸나.”
죽는시늉하면서 울부짖었던 지브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속이 시커먼 녀석이라니까…”
“그래도 이번 제안만큼은 농담이 아니야. 꼰대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처단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투크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야. 녀석이 싸지른 배다른 형제자매들의 난으로 말이지.”
“녀석을 제거하면 평화로운 가주 선거 투표가 이루어질 것 같아?”
“적어도 공적을 과시할 수는 있겠지. 다들 꼰대를 싫어하잖아? 일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녀석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는 옷에 달라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서 재차 입을 열었다.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누나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어.”
쿵!
“서, 설마 유폐 장소를 알아낸 거야?!”
에스메랄다가 사색으로 변해서 질문했다.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쇼까지 하면서 절실하게 부탁하지는 않았겠지. 아쉽지만 아니야. 하지만 동기 부여가 될지는 모르겠네.”
“동기 부여라고?”
“임신하셨데. 벌써 5개월째라고 하더라. 성별을 확인했는데 예쁜 여자아이라고 말이야. 축하해, 누나.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하고는 다르게 진짜 피가 이어진 여동생이 태어나는 거잖아?”
부르르르르
그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충격과 경악,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서 사나운 나찰처럼 일그러지는 표정.
“어, 어째서…어머니에게 손을!! 두, 두 번 다시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진짜로 순진하네. 누나는…꼰대가 정말로 그런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한 거야?”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다가온 지브릴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 전에 꼰대가 자신의 측근하고 나누는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어. 시시껄렁한 음담패설을 하면서 이런 소리를 지껄이더라고. 왜 거인족 최고 미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누나가 어째서 그렇게 못생겼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이야.”
흠칫!
에스메랄다가 눈에 띄게 동요하자 확신을 얻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누나도 알고 있지? 자신이 추녀가 아니었다면 꼰대한테 옛날옛적에 강간당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후후후후. 보아 하니까 정말로 그랬던 모양이네. 나는 모르지. 하지만 꼰대는 의심하고 있어. 아만다님은 유명한 전사일 뿐만 아니라 주술사이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혹시 거인족의 비술을 사용해서 딸의 얼굴에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하는…”
“큭!”
이를 악물며 주먹을 떨었다.
“듣자 하니까 이번에는 어떤 수작도 부리지 못하도록 임신 기간 내내 재워놓을 생각이라고 하더라. 태어나면 곧바로 데리고 와서 보모한테 맡기겠다고 말이야. 하프 자이언트의 성장은 빠르지? 내 기억이 맞다면 누나의 덩치가 거의 일반 성인만큼 자랐을 때가 겨우 7살 무렵이었으니까 말이야. 후후후.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트라우마가…”
“그만!!!”
쾅!!!
참다못한 에스메랄다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면서 진각을 밟았다.
웅성웅성
지나치게 커다란 소리에 바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우르르르르
[무슨 일이십니까? 에스메랄다님!]
[일단 문부터 열어! 급한 상황이니까 염치를 무릅쓰고 실례하겠습니다!!]
“어이쿠 이런, 아무래도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머물러버린 모양이네. 그러면 나는 이만 임무를 수행하러 가볼게. 이번에야말로 좋은 대답을 기대하면서 말이야.”
슈웅
지브릴은 그렇게 말하고 블링크 스크롤을 사용해서 미꾸라지처럼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방문을 부수며 들어오는 기사들.
폭탄이 터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안을 살펴보면서 에스메랄다에게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나찰처럼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를 악물고 있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