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화 〉 질풍가도(2)
* * *
하이잘은 잠시 침묵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후계자는 충성파를 분열시키려고 작정한 거야. 이대로 가면 우리는 자중지란으로 자멸하게 된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설마 이 모든 것이 후계자의 계획입니까?”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콜라 녀석이 저렇게 미쳐서 날뛰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후계자의 대처가 지나치게 신속하고 완벽해. 마치 서로 짜고 협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서, 설마?!!”
노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세뇌한 건가?! 콜라 녀석을!!!”
이 외침을 들은 에스메랄다는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체포하고 2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형장에 세워졌습니다. 다소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어도 약물이나 마법의 사용 징후는 보이지 않았는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일반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녀석이 후계자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면 앞뒤 정황이 맞아. 그렇다면 다음 수순은…”
화면 너머에서는 후계자의 기자회견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후계자님께서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목소리를 내는 것에 찬성한다는 말씀이십니까? ]
[물론입니다, 백성 스스로가 통치자에게 요구를 전달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거나 과격한 행위가 동원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귀족과 군인 모두가 누군가의 부모, 자식, 형제, 자매이며 우리 제니아의 동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원칙대로라면 그들을 처벌하고 심판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천년 가문에서 권한을 위임한 자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위는 찬성하되 법과 질서를 준수하라는 말씀이로군요?]
[하지만 아카이아의 사태처럼 귀족이 먼저 군대를 동원해서 학살을 자행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방금, 스스로 정답을 이야기하셨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자기방어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오히려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랭캐스터와 다를 바가 없겠죠. 천년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제니아에서 그런 규칙 위반을 저지르는 자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을 겁니다, 반드시!! ]
웅성웅성
찰칵, 찰칵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찰칵!!
단호한 선언에 다시 한번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리한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질서와 안정을 바라는 대다수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궁지에 몰린 충성파 강경 세력의 입장을 더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면 강경파 전체가 랭캐스터 연합이라고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르게 극단적이거나 과격한 발언을 해버렸다가는 그들과 동류 취급을 받거나 협력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경파 귀족들이 귀족 사회에서 고립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곧이어 타이밍 좋게 그것을 가속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스타프 남작과 콜라경은 어떻게 처벌하실 겁니까?]
[호칭에 주의해주십시오. 그들은 이제 귀족이 아니라 랭캐스터입니다. 시민들은 지금 바로 처벌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먼저 절차에 따라서 그들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실토하게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재판 과정을 거쳐서…]
하지만 리한의 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후, 후계자님! 광장, 광장을 봐주십시오!!]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당황해서 뒤돌아보자 화면 너머에서 발작하고 있는 콜라가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 루돌프!!]
[독입니다! 녀석이 이빨 속에 독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크아아아아악! 크크크큭, 크하하하하! 꼴 좋다, 가짜 후계자 녀서어어어억! 쿠웨에에엑! 네, 네놈은 나를 심판할 수 없어! 랭캐스터 연합에서…흐으으윽! 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입 밖으로 연거푸 피를 게워내면서도 광기에 차서 저주를 퍼부어대는 모습은 섬뜩하다 못해서 공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 돼, 녀석이 자결하지 못하게 막아라!! 이런 끔찍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랭캐스터 연합의 배후를 반드시 밝혀내야만 한다! 지금 당장 치료사를 불러와라, 어서 빨리!!!]
[…이미 죽었습니다.]
상태를 확인한 루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데피리스 교단에 협조를 요청해서 소생 마법을 사용한다면…]
[죄송합니다, 주군. 이미 오장육부가 완전히 녹아내렸습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되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부르르르르
쿵!
[이런 천하에 잔악무도한 놈들이!!!!]
분노한 리한이 주먹으로 단상을 내려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흥분한 모습.
덕분에 너무 놀란 기자단에서는 사진을 찍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지, 진정하십시오. 후계자님!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가만히 참아 넘기라는 소리냐? 저 후안무치한 녀석들이 감히 내 백성들을 이렇게 끔찍하게 유린하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로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대화가 아니었다.
특히나 집음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는 영상을 보존, 기록해서 느리게 돌려보거나 되감기, 빨리 감기가 가능하며 볼륨을 크게 확대하고 잡음을 제거하는 등의 필터 기능까지 이용해서 아무리 작은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연히 영상을 중계하는 방송국 스튜디오에서는 곧바로 두 사람의 대화 소리를 확대해서 제니아 전체에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후계자의 솔직한 진심(?)을 알 수 있는 오프 더 레코드.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후계자로서 자격이 없는 약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대단히 면목 없고 송구스럽지만…잊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0년은 늙은 것 같은 지친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자 기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아닙니다, 후계자님!! 기자 생활 30년…인터뷰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후계자님의 모습에 오히려 감탄했습니다!!]
[옳소!!]
[제니아에 정의를! 천인공노할 랭캐스터에게 철퇴를 내리자!!]
짝짝짝짝짝짝!!!
누군가의 제창과 박수 소리, 그것을 신호탄으로 전파되듯이 뒤따라 호응하면서 기자단과 아카이아의 시민들, 그리고 제니아의 모든 사람이 기립해서 후계자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천년 가문의 역사라 아무리 길다고 해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절대다수의 민심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위정자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부르르르르
“그래…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함이 모조리 성립하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가 있는 완벽한 선과 악의 대립 구도…래리님은 외통수에 몰렸다. 이렇게 불공정한 전쟁에서는 절대로 승리할 수가 없어!!”
TV를 움켜잡은 하이잘이 어깨를 떨면서 그렇게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터뷰는 이제 클라이막스로 향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이제 단상으로 몰려와서 앞다퉈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후계자님!]
[당연한 소리지만 랭캐스터 잔당을 쫓아서 오르드리로 진군할 예정입니다. 적의 뿌리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의가 함께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오오오오오!!
찰칵, 찰칵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 하나의 질문에만 응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냐님?]
[출정에 나서기 전의 포부를 말씀해주십시오!]
멈칫!
그녀의 질문에 리한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운을 띄웠다.
[그렇군요. 이번 전쟁은 원래 돌로레스를 처단하고 가주의 지위를 승계받아서 제니아에 정의와 질서를 가져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만…]
[혹시 생각이 변하신 겁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랭캐스터가 누구를 위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하고 있는지 명확한 이상, 그녀는 반드시 천년 가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싶은 사유를 추가하고 싶군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카이아를 위해서.]
찰칵, 찰칵, 찰칵,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다음 날 아침에 쏟아져 나오는 모든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 타이틀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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