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질풍가도(1)
* * *
****
“이건 말도 안 돼!!”
방송을 보고 있던 하이잘이 비명을 질렀다.
“저런 미친 녀석! 랭캐스터 연합이 후계자를 처단할 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허세도 적당히 부려야지. 과대망상증에 빠져있는 빌어먹을 애송이 새끼가!!”
쿵! 쿵! 쿵!
분노한 노인이 내리찍는 지팡이에 고급 카펫이 무의미하게 짓이겨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함께 방송을 보고 있던 여성이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키에 전신 근육질인 흑갈색의 피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의 이름은 에스메랄다.
올해 38살, 하이잘의 친딸이자 A급의 무장으로 투견대를 통솔하는 대장이었다.
“저 콜라라는 녀석 때문에 완전히 망해버렸다! 젠장, 방송국 관계자들을 잔인하게 살인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도 방송을 보기는 했습니다만…전쟁터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폭주가 아닙니까?”
“그래, 네년처럼 산전수전 다 겪어본 애들에게는 익숙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런 기준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라는 말이 있다.
기사 한 줄로 수백, 수천 명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 것보다 자신의 눈앞에서 굶어 죽는 강아지 한 마리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이 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태어난 신분과 성장 환경이 다를 뿐이지 대다수는 평민과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감성을 소유한 자들.
1분 전까지만 해도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서류에 무감각하게 서명했더라도, 자신과 가까운 하인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함께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주는 이율배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소리다.
팔은 안으로 굽고 내로남불은 인간의 본성.
연민의 밀도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무게가 달라진다.
이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하이잘은 구스타프 남작에게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전을 지시해서, 아카이아 학살을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쇼처럼 연출하려고 했다.
그래야 같은 방송과 소식이 전달되더라도 두 계층이 받아들이는 감상에 온도 차이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민과 귀족의 분열.
그리고 민심에서 멀어진 기득권은 그들의 대변자인 래리의 편으로 돌아서게 될 터였다.
“나는 방송국 관계자들을 전술 마법으로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잔인한 연출은 최대한 짧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도록 시체까지 통째로 날려버리라고 했지. 그래야 살인에 대한 혐오감을 최대한 줄일 수 있고 겁대가리 없이 까부는 언론 녀석들에게는 경종을 울릴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콜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방송국 관계자들을 하나씩 끔찍하게 살해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싸이코 쇼를 감상한 귀족들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으냐? 버러지 같은 평민 녀석들이 화끈하게 죽어 나가는 모습에 속이 시원하다? 어림도 없지. 저 미친놈이 우리 같은 귀족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버렸을 거라는 말이다!!”
이 말에 에스메랄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그렇다면…”
“그래! 두 세력의 갈등이 심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감대와 유대감이 형성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소리다. 아카이아의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평민과 귀족.
두 세력이 일치단결해서 이 끔찍한 학살극의 배후자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이 래리에게 희소식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 멍청한 녀석의 삽질이 거기에서 끝났다면 빠져나갈 구멍은 남아있었다. 모든 책임을 구스타프 남작에게 돌리고 꼬리를 잘라버렸으면 되니까 말이야! 물론, 뻔한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성파는 래리님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가 없어.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전부 저 녀석 하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말씀입니까?”
“맞아, 저 빌어먹을 녀석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바람에 말이야!!”
에스메랄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랭캐스터 연합…그냥 무시해버리면 되는 헛소리가 아닙니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직이고요.”
소속 인원은 기껏해야 스무 명.
대다수는 현장에서 콜라와 함께 체포되었고 겨우 4~5명만이 아카이아에서 잽싸게 도망쳐서 다섯 남작 동명의 영지로 몸을 의탁했다.
“실체가 있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어. 오히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서운 거다! 너도 후계자의 선고를 듣지 않았느냐? 랭캐스터라는 이름은 이제 제니아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귀족과 평민, 그리고 어느 세력이라도 증오해 마지않는 마녀사냥의 재물이라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후계자가 누구를 지목해서 랭캐스터라고 몰아세워도 대응할 수단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그, 그것은…아니.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만약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제니아의 어떤 귀족이라고 해도 리한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래리나 충성파라고 해도 예외는 아닐 터.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절대권력을 손에 쥐는 셈이었다.
“충성파는 이제 무너졌다. 완전히 붕괴하기 전까지 시간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상 제니아의 귀족 전체가 후계자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설마 그렇게까지 전개되겠습니까?”
에스메랄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어보자 하이잘이 실망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버리고 말았다.
“이런 멍청한 년! 얼굴이 못생겼으면 머리라도 똑똑해야지…에잉, 쯧쯧쯧. 야만인처럼 싸움박질밖에 모르는 쓸모없는 딸년이라니…”
“소, 송구합니다.”
급하게 머리를 숙이며 표정을 숨기는 그녀.
“에휴, 기초부터 설명해줄 테니까 잘 새겨듣도록 해라. 사람들의 생각이 각자 다르듯이 충성파도 마찬가지다. 모두 한마음 한뜻이 아니라 크게 분류하면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누어져 있어.”
“네, 일단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만…”
“이중에 온건파 녀석들은 후계자와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마르텔 대모를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자고 지껄이는 녀석들도 있을 정도지.”
“…제정신입니까?”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유는 있어. 어차피 마르텔 대모의 병세는 절망적이야. 최근에는 상태가 더 악화해서 의식을 회복할 가망도 없고 연명치료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지.”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까짓거 원하는 대로 만나게 해주자는 거야. 가주로 임명하려고 해도 의식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거지. 손자가 죽기 전에 할머니를 만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기를 쓰고 막는 것도 한심하다는 소리지.”
“어처구니가 없군요. 의식이 없다고 해도 가문을 물려받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현장에서 유서를 날조할 수도 있고…”
“정말로 후계자에게 가문을 물려준다는 유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마르텔 대모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어쨌든 그 별장은 돌로레스님조차 터치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니까 말이야.”
“평온의 기사. 애쉬…”
에스메랄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온건파의 주장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아! 우유부단하기 이를 데가 없는 래리님마저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주지하고 있지. 그렇다면 우리가 온건파를 억누르기 위해서 누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목소리를 키워줘야 하겠느냐?!!”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후계자에게 총력을 다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서, 설마???”
쿵!
“이제 알아듣겠느냐?!!”
하이잘이 내리찍은 지팡이가 카펫을 찢고 대리석 바닥에 균열을 냈다.
동시에 그들의 눈앞에 있는 화면 너머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기자회견장에서는 리한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었다.
[후계자님! 랭캐스터 연합은 자신들이 돌로레스와 래리님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렇다면 래리님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 그분께서 사실상의 배후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혐의에 대해서는 제가 아니라 숙부님 스스로 대답하시는 것이 타당하겠죠. 하지만…]
찰칵, 찰칵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찰칵!!
누구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그리고 리한은 카메라 너머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체크메이트를 불렀다.
[숙부 자신께서 랭캐스터와 연관이 없다면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그들과의 유착관계를 부인하셔야 할 겁니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해명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혐의는 깊어지기만 할 뿐이니까요…]
이제 그에게 적대하는 자는 누구도 랭캐스터라는 이름을 피해갈 수가 없다.
래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강경파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는 궁지에 몰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잘의 예언대로 충성파 자체가 붕괴해버린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