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H이벤트)오프 더 레코드(1)
‘스폰서 역할을 자처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용병까지 고용해준다고? 하필이면이런 타이밍에?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무역 공사가 공화국의 첩보 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설마 후계자의 배후에 그들이 있는 걸까?’
하나를 의심하자 열이 수상해졌다.
가면의 남자가 후계자 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시바레 백작이라는 한량 귀족과 나누었던 밀담마저도 의미심장해지는 것은 마찬가지.
‘두 사람의 언급한[마담]은 제니아의 암사자 로가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어.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주인을 쉽게 바꿀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에서 유추한다면…거의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날카로운 기자의 감으로 진실에 근접한 샐리는 리한의 계획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냈다는 생각에 가볍게 전율했다.
엄청난 특종의 예감.
‘우리를 이용해서 재미를 보셨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난처한 상황도 당해보셔야지. 후후후후.’
이 보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겠지만 외부에는 알려지고 싶지 않을 내용이 틀림없었다.
샐리는 자신을 기레기 취급한 리한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득의양양한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냐는 이 내용을 듣기가 무섭게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다.
“미쳤어, 자기??? 미안하지만 절대로 안 돼. 그런 내용을 보도할 수 없어. 애초에 데스크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어째서죠? 설마, 이제는 후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건가요?”
“자기는 정말…앞뒤 생각도 없이 무조건 들이박는다고 능사가 아니라니까?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지 모르겠네.”
자신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버린 샐리였지만 일단은 몰아세우지 않고 삐딱한 자세로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좋아요. 데스크에서 어째서 받아주지 않는지 이 못난 후배에게 가르쳐주세요, 선배님.”
“에휴, 알았어. 일단 제일 큰 문제는 자기의 주장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거야. 영상기록까지는 아니더라도 녹음 기록 정도는 있어야 의혹 제기라도 해볼 텐데. 자기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뇌피셜에 불과하잖아?”
“뇌, 뇌피셜은 아니거든요?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제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그게 바로 뇌피셜이라는 거야. 자기의 말대로 이 사안이 전쟁의 향방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안이라면 보도에 신중을 기울여야지. 내 말이 틀렸어?”
“…”
정곡을 찔린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만약에 방송으로 내보내고 싶다면 최소한 두 가지는 확보해야만 해. 증거와 증인. 그것도 자기의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신빙성이 높아야 하고 말이야.”
“…살짝 의외네요.”
“뭐가?”
“저는 선배님께서 새로운 권력에 눈치를 보느라 방송 자체를 반대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 말에 소냐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자기의 말대로 마담 로가와 앵커리지 무역 공사가 전부 후계자님과 한통속이라면 이런 보도는 상당히 위험하겠지. 나중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고 말이야.”
“그러면 어째서…”
“자기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은 사람 중에 하나거든? 그러니까 특종을 내보내고 싶으면 그만한 취재를 해오도록 해. 데스크는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설득해줄 테니까.”
“선배님!”
믿음직한 그녀의 모습에 감동한 샐리가 펄쩍 뛰어들어서 안겼다.
다음 말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후후후후. 게다가 돌로레스님하고는 다르게 후계자님은 조금 만만해 보이더라는 말이지. 저렇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해놓고 설마 뒤에서 호박씨를 까겠어? 게다가 로가와 무역공사가 한통속이라는 증거도 없고 말이야.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중립 지대에 있다는 이점을 십분 활용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것도…”
“선배!!!”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
샐리가 눈총을 주자 괜스레 무안해진 소냐는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크흠, 크흠. 그러고 보니까 후계자님이 우리를 초대해 주셨는데 말이야.”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상부에서 인터뷰를 따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줬으니까 더할 나위 없지. 하지만 너무 거창하게 할 생각은 없고 카메라맨과 리포터, 그리고 메인 피디인 나까지 셋만 오라고 하더라. 심야 취재라도 상관이 없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겠데.”
“당연히 해야죠! 잘하면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그러면 자기가 카메라를 들고 따라오도록 해.”
“…네?”
예상하지 못한 명령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아니. 메인 피디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어째서 제가 카메라를 들어야 해요? 리포터 역할을 맡겨주셔도 되잖아요? 사실상 그쪽이 본직에 가깝기도 하고…”
“파냐보다는 잘할 자신이 있다고?”
파냐는 리한에게 홀딱 빠져서 카리스마니, 팜므파탈이니 하는 사심 가득한 멘트를 쏟아내었던 리포터다.
“솔직히 걔보다는 제가 더 낫죠.”
“후계자님으로부터 지명이 있었어. 저녁 뉴스를 보신 모양이더라고. 게다가 걔는 바니족이잖아? 수인족이 방송 리포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우셨나 보더라.”
“큭…설마, 인간이라서 밀려나다니. 이게 바로 역차별…”
“설마 싫다고 하지는 않겠지?”
“알았어요! 까짓거 제가 카메라를 맡도록 할게요. 이래 보여도 제가 엘리트 교육도 받았던 사람이라고요? 중간에 때려치우기는 했어도 그까짓 카메라한 대 정도는…”
빽 소리를 지른 샐리는 자신만만하게 다가가서 번쩍 들어 올리지 못했다.
“비싼 거니까 절대로 떨어트리지 마라. 그거 하나에 무게가 200kg은 넘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무거운데요?!!”
“비용 절감을 위해서 경량화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 매직 아이템이라는 게 주문이 하나 더 들어가냐 마냐에 따라서 가격이 천지 차이니까 말이야. 아, 그리고 반사판하고 다른 소도구도 부탁해, 자기♡”
“하, 하나쯤은 들어주셔도 되잖아요! 선배님? 선배님!! 이런 젠장…으으으으으. 언젠가는 두고 보자! 언젠가는 반드시 앞질러 출세해서 턱 끝으로 부려먹을 테니까!!!”
자신을 두고 앞서 가버린 매정한 선배에게 분노를 쏟아낸 그녀는 낑낑거리면서 무거운 장비를 운반해 나가기 시작했다.
****
밤 11시.
소냐 일행은 리한이 머무르고 있다는 별궁으로 안내를 받았다.
지나가면서 목격한 크레센트 문의 상황은 비상 그 자체.
입이 가벼운 병사에게 들은 피셜에 의하면 일주일 내로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모양이라서 모든 사람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모양이었다.
샐리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겨우 일주일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원군이 모두 도착하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달은 필요할 텐데…후계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소문에 의하면 래리가 향한 곳은 스톰 가드라고 한다.
강 위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이자 오르드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알려진 장소.
공격과 방어, 양쪽 모두에 인원이 제한되며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해낼 수 있을 정도로 수비의 이점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끌어모아서 공격을 감행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오히려 속전속결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니고개가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방심하면 안 되겠어.’
시끌벅적한 다른 장소하고는 다르게 자신들이 안내를 받은 별궁은 조용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 사실도 어딘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끼이이이익-
“어서 오세요, 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문이 열리면서 등장한 백발의 미소녀가 자신들을 반겨주자 소녀 일행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짐, 들어줄게.”
“꺅?! 어, 어느 틈에 뒤에서…”
“미안. 놀랐어?”
동양풍 의상을 입고 있는 흑발의 미소녀가 사슴같은 눈망울로 사과해 오자 샐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사래를 쳐버리고 말았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어머? 두 분은 혹시 좌부동인가요?”
“란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린린.”
소냐의 질문에 자매는 온도 차가 느껴지는 대답을 해왔다.
“진짜 좌부동이에요?”
[선배, 선배! 좌부동이 뭔데 그렇게 놀라시는 거예요?]
깜짝 놀라는 샐리에게 귀띔으로 물어보는 파냐.
리포터 자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별로 대답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선배 대접을 받았으니 가르쳐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