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1화 〉폭로(8) (251/429)



〈 251화 〉폭로(8)

“뭐라…큭?!”

리한은 검집 끝으로 무장의 턱을 들어 올렸다.

“기사도에 뭐라고 되어있지? 네놈도 충성 맹세를 해봤다면 모르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 주군이 그릇된 길로 걸어간다면 목숨으로 충언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게 행동해라. 여기에서 도대체 네놈이 지킨 구절이 무엇이라는 말이냐?”

“입에 발린 소리를…”

꿈틀-

“입에 발린 소리라고?”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표정을 일그러트린 그는 할버드를 들고 있는 아스트라세 가문의 병사 하나를 지목했다.

“거기에 있는 너! 이쪽으로 오도록해라!!”

“네, 알겠습니다!”

리한은 상의 단추를 풀어헤치고 뒷머리를쓸어올려서 자신의 목덜미를 노출해 보였다.

“지금 당장 내 목을 치도록 해라!!”

“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계자님…”

웅성웅성.

예상하지 못한 명령에 병사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군중들까지 놀라서 술렁거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신체는 금강투합체로 보호되고 있다. 조그마한 생체기 하나 나지 않을 테니까 망설이지 말고  힘을 다해서 휘두르도록 해라!!”

“아무리 그래도…”

옆에 있는 루돌프의 눈치를 살피자 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의 말씀을 따라라.”

“지, 진심입니까? 아무리 무장이라고 하셔도 저 또한 20년을 넘게 군대에 복무했습니다. 엑스퍼트 초입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쓸데없이 재잘거리지 말고 명령에 복종해라, 병사! 닥치고 내리치라면 내리치라는 말이다!!!”

“큭! 저, 정말로 어떻게 되어도 모릅니다. 으랴아아아아앗!!”

강요를 이기지 못한 병사는 마지못해서 할버드를 번쩍 올렸다.

후우우우우웅!

[꺄아아아아악!]

[안 돼!!]

선명한 부기斧氣.

서슬이 퍼런 도끼날이 후계자의 가느다란 목덜미로 날아들자 군중들을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개중에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거나 힘이 풀려서 주저앉는 사람들이 속출.

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쩡!!!

둔탁한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우지끈 부러져나가는 할버드의 창대.

깨진 도끼날이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날아올랐고 바닥에 떨어져서 한동안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내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잦아들었다.

조용한 침묵.

자신이 장담한 것처럼 목덜미에 작은 생체기 하나 생기지 않은 리한이 차분하게 옷차림을 정돈하고 좌중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똑똑히 보았겠지? 이게 바로 일반인과 무장의 차이라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군인이 전력으로 휘두르는 무기조차 우리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아. 할버드가 이러할진대 돌멩이와 농기구는 어떠하겠느냐?!”

“…”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정적만 계속되는 가운데 그는 자신에게 말대꾸를  충성파 무장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네놈들이 무기를 뽑은 이유가 분노한 시민 하나가 썩은 계란을 하나 집어 던졌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게 그렇게 참지 못할 일이었느냐? 네놈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명예와 긍지라는 아무런 힘이 없는 연약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충족되느냐는 말이다!!!”

“크윽…”

아직도 선혈이 낭자한 학살 현장을 가리키면서 열변을 토하자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었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루돌프!”

“네, 도련님!!”

“녀석들 중에서 시민을 공격하라고 명령한 자들과 수행한 녀석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감옥에 가둬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공개 재판을 열고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에 걸맞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에도 합당한 피해보상금과 통치자로서의 사과를 전달하도록 해라. 적어도 내가 존재하는 한 이 땅에 법과 질서, 그리고 정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라는 말이다!!”

“!!!”

“물론입니다.  루돌프, 도련님의 명을 받들어서 천년 가문의 뼈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니아의 온 백성이 깨닫게 하겠습니다!!”

우렁창 대답에 만족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리한은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는 것처럼 긴 장포를 펄럭이면서 크레센트 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슈킬 가문 만세!!!”

누군가의 선창을 시작으로 세상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은 군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제니아의 진정한 후계자께서 돌아오셨돌아오셨다!!]

[리한 도련님 만세!! 마르텔 대모님 만세!! 천년 가문이여 영원하라!!!!]

****

밤 9시.

상황은 한참 전에 종료되었지만 사나그는 여전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제니아의 모든 시청자 여러분! 지금 보고 계십니까?! 현장의 분위기는 지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열광적인…그야말로 축제나 다름이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초상집이나 다름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람들은 제니아의 정당한 후계자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낮에 보여주신 정의로운 모습과 카리스마, 팜므파탈이넘치는 매력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상기된 표정으로 마이크에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하는 리포터.

‘쟤는 또 왜 이렇게 오바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샐리였지만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고양되어서 폭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사나그의 시민들은 현재“폭군을 몰아내고 천년 가문의 기강을 바로세우자!”라고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은퇴한 군인들과 혈기를 억누르지 못한 젊은이들이 앞다퉈서 모병소로 몰려드는 바람에 모집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대응애 애를 먹고 있을 지경이었다.

생방송은 끝났지만 제니아 방송국도 아주 제대로작심했는지 정규 편성을 모조리 갈아버리고 특집 뉴스를 보도, 제니아의 곳곳으로 파견한 취재팀을 총동원해서 다양한 현장 반응을 전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민심은 거의 일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가장 뜨겁게 호응하는 세력은 국민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평민들.

사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는 돌로레스의 횡포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고 원성이 자자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불평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들에게 오늘 방송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는 리한이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거론하며 충성파 무장에게 책임을 물었던 장면이었다.

귀족 사회의 반응은 살짝 미묘하다는 수준이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다가오는 무게감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덕분에 오르드리를 비롯한 수많은 도시에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대대적인 민중 시위가 일어났다.

사나그의 시민들과 똑같은 슬로건을 한마음, 한목소리로 외치며 로얄 벨트로 몰려가는 사람들.

덕분에 발끈한 래리 파벌의 귀족들이 시위대와 여기저기에서 충돌을 일으켰지만 그런 내용이 보도되면 보도될수록, 여론 지형은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귀족들의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하찮게 생각하는 일반 백성들이라고 해도 집결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 전체가 적으로 돌아서는 기분.

주변에자신의 편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유일하게 외부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방송에서는 후계자에게유리한 내용만 보도하고 있으니, 래리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중립을 선언해버리거나 아예 후계자를 지지하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샐리는 현장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의하면 후계자 파벌로 합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람이 전체 귀족의 20%…래리 파벌에 잔류하는 사람이 15%정도야. 대부분은 여전히 중립이고 래리에게 기울어 있다고 해도 겨우 반나절 사이에 이렇게 뒤집히다니…군사력의 차이는 여전히 절망적이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야.’

현재 제니아 방송국은 돌로레스를 버리고 완벽하게 리한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배짱을 부릴 수 있는지 후배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물어보니, 무슨 이유때문인지 앵커리지 무역 공사에서 파견한 용병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방송국 본사가 오르드리에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마담 로가의 영지에 있었던 것이 천행.

래리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어째서인지 자신들에게 아무런 압력을 넣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방송을 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물론, 샐리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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