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폭로(7)
“일단은 오르드리로 돌아가도록 하세. 여기에서 지체해봐야 좋을 것은 없으이…”
하지만 하이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어떤 놈이 건방지게!!”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충성파 귀족 청년이 더듬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에 누구하고 머리끄댕이라도 잡고 싸운 것처럼 흐트러져 있는 모습.
“누가 물이라도 한잔 따라주도록 해라.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침착하게 이야기하라고 해!”
멘탈을 회복한 래리가 짐짓 무게를 잡으면서 그렇게 명령을 내리자 측근 하나가 재빠르게 물병을 들어서 청년에게 따라주었다.
“꿀꺽, 꿀꺽. 감사합니다. 스읍, 하아- 스읍, 하아-”
“그래서 무슨 사단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냐?”
“아, 바, 바깥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우리 병사들에게 돌을 던지고 삽과 곡괭이를 휘둘러대고 있습니다!!”
“뭐야?!”
“천한 녀석들이 쪽수가 많아지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모양이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한심한 녀석! 명색이 무장이라는 녀석이 겨우 이까짓 일로 이렇게 당황해서 쪼르르 달려오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당장 대열로 돌아가서 모조리 쓸어버리라고 해라! 두 번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란 말이야!!”
“아니, 그래서는 안 되네.”
흥분한 무장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하이잘이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타일렀다.
“왜 막으시는 겁니까? 어르신!!”
“지금 상황을 평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네. 흥분한민중을 자극해봤자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없어. 쓸데없이 피를 흘렸다가는 적의 명분에 힘을 실어줄 뿐이야! 게다가 자네들은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네. 언론 자체가 후계자에게 장악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태에서 섣부른 행동은 금물…”
조리 있게 설명을 이어나가던 노인은 청년 무장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말꼬리를 늘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너희들 설마 벌써…”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썩은 계란을 얻어맞은 현장 지휘관 하나가 분노를 참지 못해서 그만…”
“이런 멍청한 녀석들을 봤나?!!”
촤아아아아악!
버럭 소리를 지른 하이잘이 허겁지겁 달려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동시에 차양과 방음 마법으로 가려져 있었던 바깥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썩 물러나라, 이런 버러지 같은 녀석들! 어서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목에서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지휘관들.
이미 그들의 검과 창은 새빨간 피로 물들었고 바닥에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시민들의 시체와 부상자들이 뒹굴고 있었다.
적당히 혼쭐을 내줬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초식동물처럼 뿔뿔이 흩어져야 정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민중들은 약간 물러서기만 했을 뿐이지 눈에서 독기를 품고 그들과 대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물러나라니 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너희들이야말로 우리 땅에서 당장 꺼져라!!]
[옳소!!]
[거짓과 배신으로 권력을 잡은 파렴치한 불한당 주제에! 너희 같은 것들은 귀족도 아니야! 우리 자랑스러운 제니아의 수치일 뿐이라고!!]
[감히 사나그의 선량한 시민들을 공격하다니 루돌프님께서 천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놈들!!]
[더러운 살인자! 라프텔의 학살자!!]
[내 아들 살려내라, 이 개자식들아!!]
[나, 남의 땅이라니. 여, 여기는 번즈 경의 사유지란 말이다! 이, 이런 천한 녀석들이…]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지자 당황한 지휘관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면 제아무리 커다란 호랑이라도 하룻강아지의 울음소리에 겁을 먹는 법.
그야말로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하이잘이 정말로 환장해버린 광경은 따로 있었다.
[여러분 보십시오! 래리 파벌의 병사들이 그들의 체류에 항의하는 사나그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습니다! 현장에는 유혈이 낭자하며 십수 명의 시민이 바닥에 쓰러져 있지만 그들을 구하려고 접근하는 것조차 차단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분노한 민중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미 현장의 소식을 접한 크레센트 문에서 군대를 파병했다는 소식도…]
영결식으로 따라온 것으로 추측되는 방송국의 직원들.
누가 특종의 냄새를 맡고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3층 건물 옥상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서, 카메라로 현장을 생중계하며 리포터로 보이는 여성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다.
“젠장, 당해도 제대로 당했군!”
“당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르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래리가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상황을 너무 얕잡아 봤네. 이게 의도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아니, 이쯤 되면후계자가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 이제 민중은 완전히 우리의 적으로 돌아서 버리고 말았네!! 언론의 특성을 이렇게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이용하다니…”
“그,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분 싸움에서는 적어도 가망이 없네. 아니, 가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에서 도망쳐야 해! 일단 오르드리로 돌아가세. 당분간 이 사건 때문에 곤욕을 치르겠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야. 워프 포탈은 이용할 수 없을 테니까 자네와 함께 몇 사람만이라도먼저 그리폰으로 빠져나가게.”
노인의 충고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오르드리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자네, 아직도 그런 소리를…”
“싸우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당분간은 돌로레스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너무 우유부단하게 그녀의 허물을 외면한 까닭에 이런 사단이 일어나버린 게 아닙니까? 적어도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일체의 접촉을 삼갈 생각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겠다는 소리인가?”
“스톰 가드로 향하겠습니다. 오르드리를 지키는 최종 방위선이자 마르텔 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충지죠. 그곳에서 결판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로 현명한 판단으로 보이지 않는데…자네 말대로 요충지기는 해도 오르드리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대군이 머무르는 것도 용이하지 않고 수도에서 직접 아르고스 라인을 운영하는 것이 좋을 텐데…”
“제 편에 남아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않으셔도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한숨을 쉬는 하이잘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약간의 패널티가 생기더라도 전력의 우위가 흔들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어쩔 수 없군. 여기에서는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알았네, 알았어. 잔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빠져나가도록 하세. 이러다가 전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붙잡혀 버리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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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팔콘 전사들은 도망치지 못하고 번즈 저택에 남겨진 충성파 귀족들을 모조리 체포해버렸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줄줄이 끌려 나오는 그들을 향해서 쏟아지는 시민들의 야유.
“추격대를 보내서 뒤를 쫓을까요?”
루돌프의 질문에 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숙부의 블랙 그리폰 케이오스는 왕국에서 가장 사납고 날렵하기로 유명하다지? 쓸데없이 기운 뺄 거 없어. 그냥 보내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체포되어서 무릎이 꿇려지는 충성파 귀족들에게 가까이다가갔다.
“왜 바로 사나그를 떠나지 않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것이냐?”
“흥,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죽일 테면 죽여라!”
리한의 질문에 발끈한 무장 하나가 그렇게 소리를 쳤다.
‘한 놈, 걸렸군.’
자신을 주목하는 민중과 방송국 관계자.
영결식은 끝났지만 연이어 터져 나오는 사건 때문에 생방송 중계가 연장되어서 제니아의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죽을 때는 죽더라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아야지. 네놈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닥쳐라! 더러운 배신자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많은 것이냐?!”
“이 녀석이 감히 도련님에게…”
분노한 루돌프가 경을 치려고 했지만 리한이 손을 들어서 가로막았다.
“목소리는 우렁차구나. 정작 자기 자신이야말로 주인에게 버려진 주제에 말이다. 그 충성심은 높이 사겠다. 하지만 그것 하나를 빼면 네놈은 모든 면에서 최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