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폭로(6)
“마지막까지 대답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저는 저의 길을 가겠습니다, 숙부님.”
그렇게 선을 그은 리한은 좌중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제니아의 모든 가신과 영민들이여 들으라! 지금 이 자리에서 아슈킬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노라! 오늘부터 나를 부정하는 자는 천년 가문을 부정하는 것이오, 나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백성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자이니! 지금부터 이 땅에 법과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맹세하노라!!”
웅성웅성.
척!
객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제부터 나는 병석에 누워 계시는 마르텔 대모님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인지를 받을 것이니, 이 행보를 방해하는 자는 누구도 예외 없이반역자로 처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스트라세 가문이 후계자님의 창이 되어서 앞길을 열겠습니다!!”
“미력하나마 저희 또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쩌렁쩌렁하게 합창하는 루돌프와 팔콘 전사들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동참 의사를 밝히는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식간에 주변으로 몰려드는 엄청난 인파.
[로닝햄의 영주, 저스틴 남작입니다! 후계자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툴링엄 기사단의 기사단장 키스마이어. 휘하 기사 521명과 함께 검을 바치겠습니다!]
[하이가든의 안주인인 아리아나라고 합니다. 우리 장미 마녀단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왕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들이 앞다퉈서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리한의 파벌에 참가 의사를 밝혔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는 없다.
곧바로 참가 명단이 작성되면서 그의 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래리를 따르는 충성파의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호위하면서 도망치듯이 조용히 장내를 빠져나갔다.
리한은 팔콘 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서 그들을 막지 말고 얌전히 보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에서 모조리 제거해버리고 싶지만…너무 쉽게 이기려고 하면 체하는 법이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진정한 승리는 언제나 대의명분과 정당성이 동반되어야 하는 법이다.
기발한 책략과 더러운 모략은 한 끗 차이.
루돌프의 죽음을 가장해서 위정자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왕의 귀환을 알리는 것은 대중들에게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는 재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만약에 이것이 끔찍한 학살극으로 변모하게 된다면 자신은 무기도 없는 조문객들을 비열한 함정에 빠트려서 몰살한 폭군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대중의 시선이 호의에서 적의로, 사랑에서 증오로, 기대에서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
리한은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본성을 숨기고 영웅으로 행세할 생각이었다.
****
잠시 후. 래리 파벌은 사나그의 외곽에 위치한 충성파 귀족의 별장에 집결했다.
“불나방 같은 녀석들이 주변에 몰려들고 있군.”
차양을 벌려서 바깥 상황을 확인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하이잘.
“아스트라세 가문의 군대입니까?”
“아닐세. 그저 평범한 일반 시민들일 뿐이야. 광장 중앙에서 중계되는 생방송을 감상한 모양이지. 우리에게 돌멩이라도 집어 던지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어째서 그런…”
“루돌프의 홈그라운드니까 그럴 법도 하지. 게다가 자네의 조카 녀석이 제법 그럴듯하게 민중을 선동하지 않았는가? 모르기는 몰라도 거기에 넘어간 사람이 제법 많을 거야.”
이 말에 래리는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도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저는 그저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랐을 뿐인데…”
“쯧쯧쯧쯧. 아직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니까 혼이 덜 낫군.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게!!! 자네와 조카는 이제 같은 하늘 아래서 양립할 수가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거야. 이렇게 화려하게 뒤통수를 맞았는데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건가?”
“하지만 불쌍하지 않습니까?! 타지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그 선량한 조카가 저렇게 독기를 품고…성장판마저 닫혀버렸는지 신체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더군요.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돌로레스의 소행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저는…”
“그래서 후계자님의 명령을 따라서 아내의 목을 베어서 바치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인가?”
“그, 그건…”
하이잘의 일침에 그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하지 않으려면 진작 잘했어야지. 상황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자네의 잘못일세. 뭐든지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좋게, 좋게 해결하려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쾅!
“사과를 바라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닐세!!!”
분노한 노인이 지팡이를 내리찍으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후계자는 마르텔 대모를 만나고 정식으로 가주의 자리를 계승할 걸세. 물론,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석에 누워 계시니 인지는 못 해주겠지만 유언장을 조작하고 가주의 직인을 들고나오면 어쩔 셈인가? 아니, 한술 더 떠서 만에 하나라도 애쉬님의 비호를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이란 말일세!!!”
“아니. 우리 조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마지막까지 우물쭈물하자 하이잘은 자신의 목덜미를 부여잡으면서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머리야! 세상에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자네는 아직도 자네의 조카가 3년 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제발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게.”
“자작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래리님.”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버질이 슬그머니 노인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가족이 서로 칼을 겨누며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이쯤에서 그만두겠네!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는 것이 낫겠군. 그래도 마지막 의리로 자네 마누라와 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겠네. 무덤이나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일세!”
하이잘이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것처럼 일어나면서 그렇게 말하자 래리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리적으로 어지간히 궁지에 몰려 있는 그였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자신의 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로가와 에윌루드가 이탈.
표면상으로는 라프텔 호수 일대에 창궐한 몬스터를 토벌해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상 중립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충성파의 상당수가 슬그머니 발을 빼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경가는 투크 가문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하이잘마저 떠나버리면 래리는 완전히 고립되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제발 도와주십시오. 조카와 싸우는 것은 피할 수 있다면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어쩔 수 없다면 무력으로 제압해서라도 가문으로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쯧.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지만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나도 억지는 부리지 않겠네. 순순히 도와주도록 하지.”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못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처럼 혀를 차는노인이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로군. 설마, 아슈킬 가문의 힘을 빌려서 아스트라세 가문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다니…’
영결식장의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래리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이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왜냐면 아슈킬 가문의 군사권을 그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르드리는 천년 가문의 수도답게 세경가 전체에 맞먹을 정도로 강력한 정예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그 힘은 가히 오팔 왕국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그리고 이들은 모두 래리의 명령을 따른다.
그것도 하루 이틀사이에 만들어진 결속이 아니라, 지휘체계 전체가 그의 수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후계자가 아무리 여론을 선동한다고 해도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 충성스러운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승리는 결정 사항이나 마찬가지.
하이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문의 모든 군대를 끌고 와서 적당히 비위나 맞춰주면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후후후…후계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모한 전쟁을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승리한다면 오필리아와 이리나를 모녀 덮밥으로 꿀꺽…후후후후, 후후후후후후. 우후후후후후후후후!’
생각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르는 상상에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느라 자신의 허벅지를 힘차게 비틀어 꼬집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