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8화 〉폭로(5) (248/429)



〈 248화 〉폭로(5)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백번 양보해서 돌로레스님이 저지른 일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래리님은 모르셨을 겁니다. 이분이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은 절대로 거짓이 아닙…”

“너는  모든 과정이 숙부님의 묵인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 그건…”

“게자가 숙부님의 파면 사유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른 리한은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처럼  차례 쳐다본 후에 재차 입을 열었다.

“최근에 일어난 라프텔 호수의 이변, 정체불명의 흑화 몬스터가 대량으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짚이는 것이 없으십니까?”

“라프텔…호수?”

잠시동안 10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힘이 빠진 래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것마저도 모른다는 것처럼 잡아떼시는군요. 당신에게 그나마 일말의 양심이라고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아, 아니. 나는 정말로 무슨 소리인지…”

“수호룡 엑케라곤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에 입을 연 사람은 이리나였다.

“엑케라곤?”

“도련님께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날이었습니다. 버질, 너도 함께 있었으니까 알 게 아니냐. 설마 그날 밤의 낚시를 잊어버렸다고 하지는 않겠지?”

“?!! 호, 혹시 그때 놓아준 대물이…”

웅성웅성

짚이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당혹스러워하자 객석이 술렁거렸다.

“조사에 따르면 수호룡 엑케라곤은 오래전부터 인근 주민들이 신처럼 추앙하는 존재라고 하더군요. 흉포한 여타 드래곤하고는 다르게 난폭하게 날뛰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호수 일대를 비옥하게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는 성수聖獸였다고 합니다.”

“신성 오염에 대해서는 숙부님도 들어보셨겠죠? 아니, 모르실 수가 없을 겁니다. 김나지움의 시니어들이 배우는 내용이니까요. 듣자 하니까 그 엑케라곤의 목덜미에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뽑히지 않는 저주를 새겨넣은 흑철목의 낚싯바늘을 꽂아서 호수에 가라앉히셨다고 하더군요.”

“설마 그것 때문에…”

“유도신문에 넘어가서 곧이곧대로 대답하지 마시게, 이런 멍청한 양반을 봤나!”

보다못한 하이잘이 뒤늦게 끼어들어서 래리가 경솔한 말을 뱉어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실토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런 개입은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실태는 미디어와 여론의 특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증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측근들이 감싸준다고 해서 감싸줄 수가 없는 상황.

리한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그 어리석음에 다시 한 번 속으로 웃음을터트릴 뿐이었다.

[세상에! 그러면 정말로 그 참사가 래리님 때문에 일어났다는 거야?]

[허, 참. 레반젤에서 죽은 사람만  명이 넘어간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고 하다니 정말이었군. 어쩌면 저렇게 경솔할 수가?]

[심지어 오르드리에서는 이 사건을수습하려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며? 뒷수습까지 세경가에게 모조리 떠넘겨버리고 말이야.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거 아니야?]

충격적인 폭로가 이어지자 슬금슬금 뒷담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돌로레스의 악행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불만이 적지 않았던 바.

이제는 래리의 도덕성마저 논란에 휩싸이면서 의심받는 지경이 되어버리자 여론 지형이 급격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폭로에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런 간단한사실조차 간과하는 사람이 50만 제니아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의 지위에 있는것은 어불성설. 숙부에게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있다면 지금 당장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후계자님!!”

소리를 지른 것은 래리도 그의 충성파 측근들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객석 한가운데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헐레벌떡 앞으로 달려오는 사람은 라프텔 호수의 영주, 코리 남작이었다.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후계자님의 신변에 함부로 접근하는 것이냐?!”

움찔!

이리나의 호통에 움찔하면서 멈춰섰다.

“괜찮으니까 내버려 둬라. 미안하오, 코리 남작. 언제 어디에서 목숨이 노려질지 모르다 보니 그녀의 신경이 다소 예민해졌소.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구려.”

“아닙니다! 후계자님. 제가 너무 급한 마음에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제발 하나만…부디 하나만 가르쳐주십시오!”

“말씀하시오.”

“지금 하신 말들이 모두 사실입니까? 라프텔 호수와 수호룡 엑케라곤의 신성 오염에 대한 것들이 전부…”

“쉽게 믿기는 어렵겠지. 이것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제공자가 우리 측에 넘긴 조사 자료요. 별로 길지는 않으니까 지금 바로 확인해 보시오.”

“도대체 어떤 집단이…아, 아니. 알겠습니다. 일단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료는 앵커리지 공화국의 첩보 기관인 T-7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조금  정확한 출처를 이야기하면 카밀라의 침실에서 발견한 문서가 바로 이것.

대륙 곳곳에 자신들의 눈과 귀를 흩트려놓은 첩보 조직답게 라프텔 호수의 이변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현장 조사에 참가한 마법사 중에 그들이 심어놓은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평소였다면 T-7에서 크게 관심을 가질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한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카밀라는 제니아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 사고에 관심을 가졌고, 그렇게 수집한 자료를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리나의 증언과 맞물려져서 이것이 성수 엑케라곤의 신성 오염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진상에 도달할  있었다.

증거 자료의 앞뒤 개연성이 맞아떨어지도록 조미료(조작)를 첨가한 것은 덤.

덕분에 완벽하게속아 넘어간 코리는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미안하오, 남작. 천년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문의 일원이 저지른 실수를 대신 사과드리겠소.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오, 내가 너무도 약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말도  되는 비극이 일어나버리고 말았구려. 고개 숙여 사과드리오.”

우뚝-

웅성웅성

천년 가문의 가주가 일개남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마찬가지로 너무 정중한 사과에 놀란 코리는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허둥지둥 그를 일으켜 세웠다.

“머리를 들어주십시오, 후계자님! 후계자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매서운 표정으로 사태를 일으킨 원흉을 노려보았다.

“오히려  문제에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신이요, 래리 총사령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천인공노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말이오? 낚시라고??? 당신의 그 하찮은 도락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소! 친구와 가족,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영지 사람들.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와 후계자까지  손으로 묻었다는 말이오! 하다못해 하루만…오르드리에서 하루만 더 빠르게 지원군이 도착했더라면…크흐흐흑!”

“미안…”

[대답하지 마시게. 이 장단에 놀아나면 놀아날수록 오히려 사태는 악화하기만 할 뿐이야. 지금은 대응하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는  상책이네.]

[아, 알겠습니다. 어르신.]

작게 속삭이는 하이잘의 말에 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코리의 모습에 마음이 여린귀족 일부는 이미 눈시울까지 붉히는 상황.

이제는대놓고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충성파는 아직도 그를 호위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오직 아스트라세 가문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리한은 이제 물러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여기에서 끝장을 내는 것은 불가능해. 썩어도 준치라더니 역시 늙은 요물이 최대의 걸림돌이었어. 이쪽의 수법을 읽고 대응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물러설 때야. 더 몰아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어.’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결과는 없겠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오히려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이번 폭로는 어디까지나 대의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것.

이 싸움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니 목표는 이룬 셈이다.

이것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래리파의 결속을 크게 흔들어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텔이란 그렇게 쉽사리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고민에 빠지기는 하겠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내린 어떤 명령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해결 수단은 오직 실력 행사뿐.

이젠 전쟁을 시작할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