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폭로(4)
“크흠, 크흠!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루돌프 자작.”
씰룩-
“장난?”
“아니, 이해는 하오. 저 비열한 암살자가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아서 이렇게 이간질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진심으로 그렇게 주장할 생각이오?”
이런 상황조차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려는 모습에 루돌프는 기가 막혔다.
“물론이오,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우리 마누라의 성격이 다소 유별난 것은 사실이지만…아무리 그래도 하나뿐인 조카 도련님에게 그렇게 몹쓸 짓을 했겠소? 오히려 나는가주에게 실망했다오. 제대로 된 증거 하나도 없이 저런 자의 말에 휘둘려서 이런 소동을 일으키다니…”
“그러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증언이라면 괜찮겠군요?”
가면의 남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래리의 말을 자르며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등장하셨군!”
카메라 옆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흥분하는 샐리.
“네놈은 누구냐?”
“감히 래리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다니…”
“닥쳐라!!”
충성파의 고성에 이리나가 사자후를 터트리면서 기세를 젭압했다.
“너희들이야말로 감히 이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이냐? 두 눈이 달려있다면 똑똑히 보도록 해라, 귀를 열고 음성을 들어라. 이분이야말로 바로 천년 가문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리한 폰 아슈킬님이다!!!”
파아아앗!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가면을 벗은리한이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
모두가 충격과 경악에 휩싸여서 말문이 막혀버린 사이.
쾅쾅! 쾅쾅! 쾅쾅!
팔콘 전사들이 발을 구르며 지축을 울렸고 자신들의 병장기를 두드리면서 장내의 분위기를 단숨에 휘어잡았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쿵!
“후계자님을 뵙습니다!!”
“후, 후계자님을 뵙습니다!”
파도에 휩쓸리듯이 일사불란하게 부복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아스트라세 가문의 복명복창에, 장내의 귀족 대다수는 물론이고 래리의 충성파 무장들까지 일부 머리를 조아려버리고 말았다.
실질적으로 제니아의 모든 귀족 가문이 무릎을 꿇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야말로 왕의 귀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려한 등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숙부. 무려 3년 만이라군요? 제 얼굴을 알아보시겠죠?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하기야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제 불꽃 흉터까지 모른다고 하지는 못하실 테지만…”
“사, 살아있었구나. 리한! 정말로 네가…”
“다가오지 마십시오!!”
놀라움과 반가움, 당혹스러운 같은 여러 가지 표정이 뒤섞인 래리가 두 팔을 벌리며 접근했지만 리한은 차갑게 일갈해서 선을 그었다.
“낯짝이 두꺼운것도 정도가 있지. 숙부는 양심도 없는 겁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냐?”
“3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설마 저에게까지 발뺌하시려는 겁니까? 숙모님의 사주로 충성스러운 부하 수천 명이 머나먼 타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저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고요. 하지만 숙부님께서는 저를 반겨주시기는커녕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현상금까지 걸고 제니아를 봉쇄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더러운 변명 따위는 집어치우십시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심지어는 제니아의 모든 귀족이 아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인하시려고 한다면 또 다른 증인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딱!
손가락을 튕겨서 신호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명의 무장이 앞으로 나와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거수례擧手禮를 취했다.
“귀관들의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라이너라고 합니다! 제니아 서남 베르디 강가의 국경 관문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입니다.”
“더프입니다! 같은 임지에 소속되어 공동 책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귀관들은 어째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지?”
“상부, 아니. 천하의 대역죄인 돌로레스를 고발하고 그 추악한 실체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자진해서출두했습니다!!”
웅성웅성!
한낱 하급 무장에 불과한 두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기에는 지나치게 당돌한 발언에 영결식장이 다시 한번 시끌벅적해졌다.
쾅쾅쾅!
“입을 다물어라!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이냐?!”
자신의 검집을 바닥에 두드려대는 루돌프의 으름장으로 잠잠해지는 사위.
“어떤 실체를 고발한다는 것이냐?”
“저희가 받은 비공식 지시 사항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발언을 허락하겠다.”
“네, 제니아의 국경을 봉쇄하고 검문 수색으로 출입하는 모든 사람의 신원을 철저하게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절차에는 아르고스 라인의 감시 시스템까지 동원되었으며, 천년 가문의 후계자 및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체포 구금하여상부에 보고, 이에 불응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결 처분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 누구냐?”
“천하의 대역죄인 돌로레스입니다!!!”
“이것에 대한 증거 자료를 가지고 있느냐?”
“저희가 기록한 통신 자료가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지시를 받은 직후에 파기해야 하지만 언제 토사구팽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따로 보관해둔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십니까? 숙부.”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두 사람 모두 수고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후계자님이 허락해주신다면 한 번만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를 주십시오!”
“좋다.”
리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
대표자로 라이너가 앞으로 나왔다.
“제니아의 귀족들이여! 우리 또한 한때는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래리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신하와 주군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우리는 깨달았소!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도 외면하고 있었지. 저 사악한 악처惡妻가 실권을 잡고 휘두르는 한 우리는 단순하게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오! 그러니 부질없는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시오. 우리가 믿고 따를 사람은 오직 정당한 후계자인 리한님밖에 없소!!”
웅성웅성
[저 더러운 배신자들이…]
[뒷배가 생기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졌군.]
[아니, 그렇게 일방적으로 비난한 일만은 아니야. 나는 저 친구들을 알아. 어지간해서는 쉽사리 변절을 생각할 녀석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귀족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충성파는 여전히 적의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잘잘못이 명백하게 가려지자, 처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세가 꺾여버리고 말았다.
‘일단 기선 제압은 확실하게 했군.’
리한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처음에 공개한 루돌프의 유언장.
사로잡은 야월의 암살자를 고문하는 장면은 100% 조작한 내용이었다.
진짜 야월의 암살자들은 아토스의 저택, 장미정원에서 함정에 빠져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즉사해버렸다.
물론, 폭스 하운드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녀들은 엄밀히 따지면 야월과는 무관계.
하지만 진짜 증거가 아니라고 해도 사실관계가 명확한 상태에서 적절히 활용해서 지금처럼 효과를 극대화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리가 마지막까지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나왔다면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기 때문에 양심에 찔려서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 패착이었다.
비록 자신의 입으로 죄를 인정하거나 자백하지 않았더라도 대중에게는 모든 혐의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한은 여기까지 몰아넣은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미 죄과는 명백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숙부님!”
“무, 무슨…”
“천년 가문의 후계자로서 섭정 마르텔 대모를 대신하여 명령합니다. 첫째!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천년 가문을 위계질서를 무너트린 돌로레스를 즉시 처형하십시오! 그리고 둘째! 오르드리 외곽 별장에 주둔해서 마르텔 대모를 구금하고 있는 군대를 해산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을 물어서 총사령관의 지위를 내려놓고 가지고 있는 모든 군사지휘권을 포기하십시오!!”
“!!!!”
웅성웅성웅성!
하나만으로도 터무니없는 요구가 셋이나 제시가 되어버리자 장내는 지금까지 하고 비교도 될 수가 없을 정도로 시끌벅적해졌다.
“아니, 나, 나는…”
말문이 막힌 래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에는 절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그의 측근인 버질이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