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결자해지(10)
“샐리라고 합니다.그러니까 이제 비켜주세요.”
“그냥 샐리라고요?”
“제니아 방송국에서 일하는 PD겸 기자예요.”
“아니, 아니. 제 질문은 직업을 묻는 게 아니라 당신의 성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행동거지를보아하니까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굉장히 까칠하시군요. 저는 그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빠직.
눈치 없이 끈질기게 촬영을 방해하면서 민감한 신상 정보를 캐물어 오자 그녀의 관자놀이에 십자로 형태의 굵은 힘줄이 튀어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에게 진상 처리를 맡긴 총괄 PD는 시간이 없다는 사인을보내면서 재촉하는 상황.
‘참자, 참아. 참을 인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더라.’
“차분하게 알려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지금이 자리에 있으시면 저희가 촬영을 계속할 수가 없거든요.”
“아, 그렇군요! 하하하하하. 이거 제가실례했습니다. 처음 보는 기계라서 신기한 나머지 그만. 그런데 이 카메라는 작동하는 원리가 뭡니까? 역시 매직 아이템이겠죠? 만 리 밖에서도 실시간으로 방송을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됐으니까 제발 좀 따라오시라고요!!”
“네, 넷!!”
버럭 소리를 지르자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졸졸 뒤를 따라왔다.
‘무슨 귀족이 이래?’
순간적으로 욱하는 바람에 고압적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지만 귀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간신히 개국한 방송국이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었다.
별로 상대하고 싶은 유형의 남자는 아니었지만 샐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성을 밝히기로 했다.
“샐리 겜빗이에요.”
“겜빗입니까? 설마 당신이 그 유명한 겜빗 가문의 영애였다니…”
“죄송하지만 통성명은 하고 싶지 않네요. 저는 사교계 활동이나 친목질 같은 것은 딱 질색이거든요. 이해해 주시겠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끈을 풀어버렸다.
터져 나오듯이 흘러내리는 탐스러운 붉은 곱슬머리.
안경을 벗고 상위 단추를 하나 열어서 커다란 가슴 골짜기를 드러내 보이자 아니나 다를까 두 눈이 동그래지면서 인중이 원숭이처럼 늘어졌다.
“오오오오. 이 무슨 훌륭한 과ㅅ…크흠, 크흠.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역시 남자는 단순하다니까.’
순진한 반응에 속으로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낼 셈으로 응대를 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많은 백작님께서는 무엇을 알고 싶은 건가요?”
“아, 그게 말입니다…”
하지만 시바레가 뭔가를 말하기 전에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기에 있었군. 내가 분명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라고했던 것으로 아는데 말이야. 감히 나를 번거롭게 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히이이이익! 후, 후계자님?!!”
‘후계자?’
갑작스럽게 등장한 수수께끼의 인물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샐리.
“어서 따라오도록 해라. 마담이 너를 만나보겠다고 하는구나.”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약속대로 여기까지 판을 깔아줬으니까 나머지는 너에게 달렸다. 평소 습관대로 촐랑거리지 말고 반드시 그녀를 설득하도록 해라. 만에 하나라도 실패했다가는…”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해내고 말겠습니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딘가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귀를 쫑긋이 곧추세웠다.
“그나저나 슬그머니 남의 대화를 엿듣는 이 못된 쥐새…아니, 레이디는 누구지?”
수수께끼의 남자가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면서 질문해 오자 자신도 모르게 뜨끔해버리고 말았다.
“아, 그녀는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입니다.”
“기자? 요즘 기자는 자신의 몸을 팔아서특종을 캐내나 보지?”
흠칫!
점잖지 못한 차림새를 타박하듯이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가슴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무, 무슨 말씀을…그녀는 겜ㅂ…”
“크흠, 크흠!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실례되는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요.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대화라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셨어야죠!!”
“흥,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기사 한 줄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랩독Lapdog주제에 잘도 떠들어대는군. 너희가 내놓는 특종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약점이나 비밀이 아니냐? 아니면 아무런 근거도 없는중상모략이나 협잡, 가십, 가짜 뉴스거나 말이야. 공화국에서는너희와 같은 부류를 기레기라고 하더군. 너무 더러운 종자들이라서 흉악범 수용소에조차 자신의 명함도 밝히지 못한다지?”
“뭇…?!”
순식간에 쏟아져나오는 터무니없는 매도에그녀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팔랑거리면서돌아다니지 말고 카메라나 돌리도록 해라. 그게 역사가 바뀌는순간에 너희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이니까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손을 휙휙 저으며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양쪽의 눈치를 살피던 시바레가 허둥지둥 허리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했지만, 귀를 붙잡혀서 질질 끌려가 버렸고 샐리도 그런 그에게 일말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잠시 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씩씩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온 그녀.
진상 처리를 맡겼던 메인 PD인 소냐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설마, 조금 전에 따라간 귀족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거야?”
“아니에요!! 아,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네. 그 미친 XX.”
“쉬잇! 너무 큰 소리 내면 못써. 게다가 앞에 계시는 분들에게 들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험한 소리를 뱉어내고 그래?”
“아, 몰라요. 들으라면 들으라고 그러죠! 누구는 눈치를 보고 싶어서 보는 줄 아나.”
“얘가 진짜…휴우,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이야기 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재차 추궁하면서 물어보자 샐리는 마지못해서 조금 전에 일어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정말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PD님이 생각해도 황당하시죠?”
“왕국의 귀족 중에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공화국에서도 가끔 그런 독설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는데 굉장히 특이한 타입이네.”
“…특이한 타입? 아니, 이런 폭언을 들었는데 반응이 고작 그거에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어보자 소냐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어른스러운 태도로 그녀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자기도 참. 이 바닥에서 오래 해 먹으려면 그런 말에 일일이 관심을 두면 안 돼요.”
“그,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듣자 하니까 공화국에서도 그렇게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사표를 냈다며? 그래도이 바닥에서 10년을 일했다는 사람이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공화국에서 넘어온 것은 PD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서 방송국 개국에 참여한 사람이고. 자기는 1기 공채로뽑은 사람이잖아? 경우가 달라도 아주 다르지. 예전보다 근무 환경도 좋고돈도 많이 받으니까 말이야. 호호호호호!”
“읏.”
박봉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자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냐는 금방 자조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얄밉기는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으니까.”
“틀리지 않았다니요?”
“…자기는 대체 뭘 기대한 거야? 여기는 공화국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봉건 사회란 말이야. 이 구역에서 귀족 나리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자기 한 사람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어. 직업을 잃는 게 아니라, 머리 위에 이게 물리적으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목이 싹둑 잘려나가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우리 방송국이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장님의 인맥 덕분이야. 그분이 돌로레스 마님에게 잘 보이려고 공화국에서 유행하는 귀한 장신구와 브랜드 보석을 얼마나 많이 가져다 바친 줄 아니?”
“…”
샐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자 그녀는 어깨를 두드리면서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자기. 앞에서 겁을 줘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공화국보다 마음 놓고 일하기는 훨씬 편한 환경이니까 말이야. 각종 보도 규제에 까다로운 법과 절차, 정치가, 기업, 시민 단체, 등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귀족의 눈치만 살피면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