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2화 〉결자해지(9) (242/429)



〈 242화 〉결자해지(9)

왜냐면 국민부터 혁명 정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귀족의 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현장 지휘관들은 모두 평민 출신의장교와 부사관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실력도 굉장히 준수한 편이었는데 비록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서 고급 장교로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정규 군사 훈련을 수료하고 실전 경험까지 풍부한 베테랑들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때 당시에 공화국 군대에는 애국심과 민주주의 사상에 감화된 엄청난 숫자의 평민들이 자원해서 입대하고 있었다.

 중에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힘을 숨긴 은거 기인과 상인 연합에서 고용한 용병들, 그리고 던전 공략의 스페셜리스트인 모험가들까지 다양한 실력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문제는 뿌리부터 귀족이었던 헨리가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전투에서승리한 직후 그는 군대 재편을 위해서 필요한 고급 장교의 충원 요구 명단을 작성해서 혁명 정부에 제출했다.

그 숫자는 72명, 모두 다 귀족이었다.

군대를 운영하는  꼭 필요한 인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구한 내용이었고 실제로도 실력 자체가 나무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그들 중에 상당수가 민중을 탄압하고 착취했던 악질적인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이미 처형 날짜까지 잡혀 있던 상황.

하지만 이미 승리의 뽕맛에 취해 있었던 혁명 정부에게 이 요청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사안을 두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서 며칠 동안 격렬한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이미 국민의 여론과 대다수 여론이 귀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요청이 전면적으로 수용이 되었다.

그리고 파비오 상인 연합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를 시작했다.

72명 귀족 전체의 대대적인 이미지 세탁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걸린 타이틀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멸사봉공에 투신한 혁명의 전사들!”이었다.

당연하지만 사형을 앞두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귀족들이 이런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죄수에서 영웅으로 인생 역전.

이들은 수많은 민중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환호 속에서 전쟁터로 떠났고 전쟁에서 활약할 때마다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부에서 파견한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귀족 시절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 국민의 관심과 사랑.

쏟아지는 팬레터와 마음이 담긴 선물에 파묻혀버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친 자들도 나왔다.

게다가 상당히 급조해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헨리의 군대는 태생부터 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부패하고 무능한 왕정 시절의 장군들이 혁명으로 모조리 쓸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 자신이 꿈꾸던 군대의 모든 로망을 실현한 드림팀을 만들어 냈다.

신분의 차이와 갈등은 여전히 커다란 불안 요소였지만 단두대로 끌려갈 뻔했던 귀족들은 상당히 고분고분해져서 총사령관의 명령을 따랐고, 평민 지휘관들도 포비라는 고문관을 겪었기 때문에 인사조치에 커다란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시민 해방군은 어디를 가도 환영을 받는다.

왕과 귀족의 폭정에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보다 달콤한 유혹이 있을 수가 없었다.

공화국 군대는 어디를 가도 환영을 받았고 자발적으로 군대에 합류하는 지원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성원에 힘을 입어서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

주변 연합국들이 버티지 못하고 강화를 요청했을 때는 이미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되찾고 국토를 3배 가까이 넓힌 후였다.

혁명 정부는 이런 결과에 만세를 부르며 세계만방에 민주주의의 승리를 알렸다.

물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 시대를 끝내고 국민의 대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한 진보를 이뤄낸 것만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찾아왔냐면 대답은 “아니오”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안정을 되찾자 파비오 연합은 본색을 드러내서 국가 권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을 가진 자가 힘이고, 정의며, 법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천국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들은 로얄 벨트와 유사하게 상위 0.0001%의 부자만이 입주할 수 있는 크라운 특구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거처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특권 계급을“코로나.”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국가 경제의 대부분의 그들의 손아귀에있었고 재벌 2세, 3세, 4세, 5세의 승계가 이어져서 현재는 15, 16세까지 부와 권력을 계승해 나가고 있었다.

언론, 권력, 입법, 사법, 행정부까지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54회나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 코로나 출신이 아닌 경우는 딱 1번 밖에 없었으며, 정부 여당의 구성원은 언제나 이들이 과반을 차지했다.

여기에 전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증명한 엄청난 숫자의 귀족들이 추가로 사면을 받아서 “슈퍼 히어로”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서 명맥을 이어온 것은 덤이다.

이들 대부분이 코로나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마치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리며, 정부와 이데올로기 홍보를 위해서 전쟁만이 아니라 인명 구조와 치안 유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투입이 되었다.

수많은 기업의 후원을 등에 업고 온갖 혜택과 편의를 누리는 슈퍼 히어로.

거기에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까지.

이들이 뒤에서 아무리 구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덮어버리는데 너무 큰 사건만 아니라면 언론과 경찰, 그리고 국가 권력까지 나서서 무마해줬기 때문에 사실상 귀족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 아직까지도 귀족이라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며 가문 대대로 태중양생술과 엘리트 교육으로 후계자를 양성하는 제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신분 제도가 사라졌는지도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부당함에 실망하고 분노한 민중들이 슈퍼 히어로의 피해자 연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시위를 이어오고 있었지만, 정부는 이들을 위험천만한 분리주의자로 규정해서 탄압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언론마저 권력에 꼬리를 흔드는 상태.

태생부터 파비오 상인 연합이 혁명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낸 어용 조직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수 있었다.

시대가 흘러서 종이와 팬에 의존하는 신문을 대체해서 생생한 현장을 전할  있는 방송국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이 공고한 카르텔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공화국의 현실에 실망한 언론인 중에 일부는 아예 외국으로 나와서 새로운 언론 환경에 투신하는 자들이 있었다.

샐리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물론, 하필이면 봉건 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전근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오팔 왕국으로 흘러온 현실에 본인 스스로도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


“영결식 시작 40분 전입니다. 간단하게 마지막 리허설 시작할게요!”

“카메라 모두 이상 없죠? 하나씩 ok싸인 보내주세요. 1번, 2번, 3번…저기요?”

“아니, 저기에 있는 아저씨는 뭐야?  얼쩡거리며  있어?”

“샐리씨, 보아 하니까 귀족인 모양인데 자기가 가서 해결 좀 해봐.”

“또 저예요?”

“그래, 어쨌거나 자기도 귀족 출신이잖아? 나라는 달라도 같은 귀족 출신이니까 그나마 말귀가 통할 거 아니야?”

“공화국 귀족하고 왕국 귀족이 뭐가 같아요? 게다가 저는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고요. 제발  비교할 것을 비교하셔야지…”

그렇게 투덜거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카메라를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귀족에게 다가가서 눈치를 줬다.

“크흠, 크흠!”

“어이쿠, 깜짝이야!”

살짝 과장스러운 탄성을 뱉어내며 뒤를 돌아보는 남자.

분노한 PD가 아저씨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푸른 곱슬머리에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미청년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지금 중요한 리허설 도중이라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리를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제가 눈치도 없이 실수했군요.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그나마 꽉 막힌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였기때문에살짝 안심하는샐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 예의겠지요. 저는 시바레 백작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