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0화 〉결자해지(7) (240/429)



〈 240화 〉결자해지(7)

“어쨌든 자네도 취미활동에만 몰두하지 말고 영지 일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말일세. 천년 가문을 물려받을 사람이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쓰겠는가?”

“하하하. 면목 없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어르신이시군요. 그런 연세에도 이렇게 박식하시니…”

“사실은 저녁 뉴스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굉장히 섹시해서 말일세. 도톰한 입술로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귀에 쏙쏙 들어오던지. 크으~”

“…”

래리는 존경의 눈빛을 거두고 다시 벌레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고 그래? 나한테만 뭐라고 하지 말고 자네도 조금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법인데 자식이 하나밖에 없어서 안심할 수 있겠는가? 돌로레스가 성격이 조금 지랄 맞아서 그렇지, 대단한 미인이 아닌가? 크으, 그렇게 표독한 눈매에 독이 바짝 오른 암표범 같은 년을 굴복시키는 것도 나름대로 묘미가…”

고오오오오!

“충고하는  은근슬쩍 남의 부인을 희롱하지 마시지요, 어르신. 멸문당하고 싶으십니까?”

움찔!

선을 넘는행동에 낯빛이 변해서 경고해 오자 하이잘은 화들짝 놀라서 놀란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크흠. 아니 자네는  농담을 다큐로 받고 그러나? 마누라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으면서…”

“…아무리 껄끄러워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제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시면 투크 가문 자체를 역사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알겠네, 알겠어. 그러니까 고정하게. 이거야 원, 살이 떨려서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수명이 줄어버리겠구만. 에잉…”

마지막까지 너스레를 떨기는 했지만 지팡이룰 붙잡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어지간히 겁을 먹은 눈치였다.

영결식은 이제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태중양생술과 엘리트 무장 교육, 그리고 배틀 메이지 육성으로 귀족의 힘이 공고해진 현대 사회에서도 민중 봉기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만큼 잔혹한 폭정을 견디다 못해서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

하지만안타깝게도 결과는 대부분 실패.

아니, 성공한다고 해도 이름만 바뀐 귀족 권력이 다시 한번 민중을 지배하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앵커리지 공화국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지배 구조를 살펴보면 귀족 사회 못지않은 공고한 계급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반쪽짜리 혁명.

어째서 이런 결과물이 나와버렸는지를 살펴보려면 잠시 사건이 일어난 당시 시점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앵커리지 공화국의 파운딩 파더.

최초의 혁명 정부를 수립한 주체는 파비오 상인 연합이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자본가들이었다.

아직 워프 포탈이 발명되지 않았던시절에 앵커리지 왕국 무역의 주요 수단이었던 비공정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해 막대한 재산을 끌어모은 집단.

얼마나 돈이 많았는지 자신들의 상품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숫자의 용병을 고용해서, 그 힘이 군대에 필적한다고 일컬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절대로   없는 것이 하나있는데, 그게 바로 귀족 사회의 로얄 클럽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었다.

자본가들이 얼마나 그들을 동경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실로 다양했다.

하나, 귀족 사회가 외부 유출을 엄금하는 태중양생술을 엄청난 거액을 주고 몰래 사들여서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시술했다.

둘, 김나지움에서 은퇴한 교사들을 역시 거액을 주고 몰래 과외 교사로 초빙해서 엘리트 무장 교육과 마법사 훈련을 받게 했다.

셋, 왕실을 찾아가서 자신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주고 지위를 인정해주면 사업체 절반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넷, 몰락 귀족에게 찾아가서 족보를 사서 신분을 세탁하려고 했다.

등등등…

이렇게 다양한 편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로얄 클럽에 들어가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결과는 대실패.

오히려 사교계에서는 천한 자본가들이 미쳐서 발악한다면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서 그들에게 수여한 노블 마크까지 박탈해버렸을 정도였다.

결국에는 이런 부르주아와 귀족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일어난 반란이 바로 공화국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의 실체다.

당시에 이 사상은 부르주아들이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민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는데, 덕분에 사상에 선동당한 시민들이 왕정을 무너트리기가 무섭게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단두대로 끌고 가서 목을 베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파비오 상인 연합은 자연스럽게 민중의 대표로 추대되었다.

돈과 권력을 모두 손에 쥔 그들은 마침내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본가들의 천국을 만들  있다고 생각했지만, 본격적으로 나라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기업을 운영하는 것과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력으로 자수성가한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들이 부패하고 썩어빠진 데다가 무능하기까지 하다며 얕잡아 봤지만, 그럼에도 수백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운영해 온 노하우는 장사치들이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행정, 관료, 사법, 군사, 심지어는 자신들의 특기인경제 분야마저도.

국가의 관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덕분에 나라가 개판이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은 처음부터 모든 정책이 실패했지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는 데만 그만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살아남은 귀족 대다수는 자신들의 재산을 가지고 국외로 도망쳐버렸으며, 피와 광기에 취해서 통제력을 잃어버린 민중들은 이제 귀족이 아니라 누구의 목이라도 베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거기에 민주주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주변 국가에서 연합을 맺고 침략해 들어오면서, 혁명 정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파비오 상인 연합을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다방면으로 애를 썼지만 결과는 대실패.

기본적인 내부 통제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정부의 독재 공포 정치로 아슬아슬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는 반년 동안 패배를 거듭하며 나라의 절반을 적들에게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수도에서 불과 50km떨어진 곳까지 외국 연합군들이 들이닥친 상황.

이때, 야전 지휘관 중의 하나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혁명 정부에게 직소를 하는데, 이 내용이 생각하지도 못한 반격의 실마리를 던져주게 되었다.

그 내용을 짧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발 총사령관을 교체해라,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 새끼들아! 무슨 놈의 장군이라는 녀석이 전쟁의 전짜도 모르는 정부의 낙하산 인사라는  말이 되냐? 씨발 귀족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싸울 줄 아는 녀석을 데려와서 전쟁을 지휘하게 하라는 말이야, 이 개새끼들아!!!”

욕설이 가득한 데다가 자신들의 혁명 기치를 통째로 부정하는 황당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지만, 의외로 정부는 이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심지어는 수용해버리기까지 했다.

왜냐면 그만큼 궁지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수도 론데니움의 시민들은 계속되는 군대의 패배에 겁에 질릴 대로 질려있었다.

외국으로 도망친 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혁명에 가담한 민중을 닥치는 대로 몰살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아주 일부가 저지른 소행이 굉장히 과장되어서 퍼져나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왜냐면 귀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인식이 당연하게퍼져 있는 데다가, 사람의 공포 심리를 자극하는 소문은 원래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 나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이런 근거 없는 낭설에 겁을 먹은 것은 혁명 정부도 마찬가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이런 직소를 마주하게 되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심각하게 논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명분도 없이 자신들이 몰아낸 귀족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는 없는 법.

그래서 파비오 상인 연합은 고민 끝에 꼼수를 하나 생각해내게 되었는데.

이 조치가 바로 오늘날 앵커리지 공화국에서 귀족이라는 계급이 태연하게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계기.

이름하여 슈퍼히어로라는 자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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