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결자해지(6)
유가족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래리는 측근들과 함께 귀빈석으로 이동했다.
아스트라세 가문을 제외한 커딩가, 루디아브, 투크 4대 세경가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는 상황.
“래리님을 뵙습니다!”
“에헤이~ 이 사람들이…너무 이렇게 격식 차리지 말라니까 그러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머리를 숙이자 다시 한번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각 가문을 대표하는 가주들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군요, 로가. 에윌루드 공과 함께 오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라프텔 호수의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는데 하필 제가 등산을 떠난 바람에…”
“괜찮습니다, 그보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쌀쌀맞게 대답한 그녀는 악수하는 등, 마는 등 그곳에서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모습에 눈썹을 씰룩거리는 래리의 측근.
“저런 건방진…”
“어허! 마담한테 건방지다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버질!”
“하지만 주군. 아무리 세경가의 가주라도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제니아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면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십시오!”
“기강이고 나발이고 무슨 자격으로 그런단 말이냐? 비록 내가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표면적으로는 세경가의 가주와 동등한 위치야. 게다가 로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몬스터군단과 싸우다가 장례식에 합류하지 않았느냐? 피곤해서 조금 까칠하게 굴었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말도록 해라.”
“그,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용히 타이르자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하지만 반응이 이상한 것은 뒤이어 악수를 청한 에윌루드도마찬가지였다.
“오, 오,오랜만입니다. 래래님! 그, 그동안 강령, 아니, 강녕하셨습니까? 하하하하하…”
심하게 말을 더듬으면서 누가 봐도 어색하기 이를 데가 없는 웃음을 터트렸고 굉장히 경계하는 것처럼 쭈뼛거리고 있었다.
“자네까지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영결식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해버렸나 봅니다. 하하하하하하.”
“싱거운 사람같으니라고.”
뭔가 미심쩍고 수상하기는 했지만 굳이 파고들지 않고 마지막 차례로 넘어갔다.
지팡이를 양손에 짚고 서 있는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노인.
“하이잘 옹도 참석해주셨군요, 이제 그만 적당한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시고 일선에서 물러나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카카카카카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리에 앉기나 하시게. 늙은이는 이제 오래 서 있으면 무릎이 시려.”
앞선 두 사람과 다르게 그리 달갑지는 않은 상대였지만 그나마 넉살 좋게 웃으면서 정상적으로 대꾸를 해왔다.
그야말로 광견 투크 가문의 가주 하이잘이다.
현재 나이 128세.
대장군 루크와 비교하면 그나마 한 세대 정도는 젊다(?)고 할 수 있지만, 평범한 귀족이라면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나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자신이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
실제로노망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늙은 요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모략과 정치 감각으로 아직까지 건재함을 괴시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실 그가 정말로 은퇴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호사가들이 일관적으로 말하는 중론에 의하면 그가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주변에 너무 많은 정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 대부분은 자신의 자식과 손자들.
그가 자신의 가족과 척을 지게 된 이력을 살펴보려면 먼저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알아봐야만 한다.
끝없는 정욕의 화신이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여성이라면 여신에게도 껄떡거릴 것이라고 알려진 하이잘 옹.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서 왕국 모든 여성의 공공의 적이라고 말한다.
사회에 별다른 폐를 끼치지 않는 단순한 시정잡배의 사정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문제는 그가 자신의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미녀를 겁탈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러운 흉계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투크 가문의 후계자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인을 겁탈했다가 발각당해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매질을 당했던 것으로 시작.
다시는 그런 망나니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개가 똥을 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천년 가문을 제외하면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가주의 지위에 오른 다음부터 본색을 드러내서, 아들, 손자, 친척, 신하들의 부인, 딸, 며느리, 어머니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취향인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해버렸다.
당연하지만그런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고 온갖 반발과 저항에 부딪쳐야만 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과 신하들이 손을 잡고 역모를 일으키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지만, 그는 수많은 암살 시도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나갔다.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공한 것은 아니라서 오필리아와 로가, 심지어는 돌로레스에게까지 추근거렸다가 경을 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리폰 사건에서는 방계의 자식이 연루되어서 죽었다는 것을 빌미로 아스트라세 가문에 사죄를 요구하며 이리나를 자신의 첩으로 보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아직까지 끈질기게 이어나가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렇게 수많은 여성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한 끝에 현재까지 슬하에 두고 있는 자식의 숫자는 267명.
첫째 아들과 막내아들의 나이 차이만 무려 100년이 넘는다.
하지만 이것도 정식으로 인지認知를 해준 숫자일 뿐, 디아스포라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사생아의 숫자가 얼마나 많을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식 중에 3분의 2가 그에게 워한을 품고 죽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 집안은 이미 콩가루 상태에, 족보도 그냥 개족보가 아니라 미친 개족보라서 광견 가문이라고 불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시중에 심심치 않게 돌아다닌다고 한다.
물론, 정말로 미친 개족보라서 광견 가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투견鬪犬대라고 불리는 가문의 정예 부대에서 따온 별명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런 엽색獵色행각 때문에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에게 공공의 적이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에, 그가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노망이 들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햐~ 오필리아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군.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가 불끈해지지 않느냐? 저 요염한 맵시를 봐라. 크으으- 이제부터 밤이 외로워질 텐데 누가 저 뜨거운 육체를 위로해줄꼬?”
추저분한 음담패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바람에 사람이 좋은 래리의 얼굴도 저절로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크흠. 하이잘 공은 여전하시군요. 지난번에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 겁니까? 그러다가 정말로 뒤에서 칼침을 맞으실지도 모르니까 부디 자중하십시오.”
“예끼, 이놈! 남자의 생명은 아랫도리가 죽는 순간에 끝나는 거야. 모름지기 사내라면 마지막순간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게 자신이 남근을 뻣뻣이 바로 세워야지.”
“끄응…그나저나 3층 객석 뒤에 있는 외부인들은 누구입니까? 보아하니 아스트라세 가문이 부리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화제를 돌리려고 그렇게 물어봤지만 하이잘은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에잉, 자네는 젊은 사람이 그런 것도 몰라서 이런 늙은이한테 물어보는 건가? 저들은 기자들이라네, 기. 자.”
“기자요?”
“그래. 몇 년 전부터 앵커리지 공화국에서 새롭게 생겨난 직업이라고 하더군. 요즘은 영상 기록장치와통신 마법이 흔해졌으니까 말이야. 두 기술을 접목해서 현장 상황을 방송국이라는 전송한 다음에 시청자들에게 중계해준다고 하더군. 영결식도 생방송을 한다고 그러던데?”
“그러면 혹시 왕실에서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닐세. 지금 제니아는 아르고스 라인의 봉쇄 조치 때문에 외부하고 통신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대신에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한 대부분의 귀족이 지켜보고 있을 걸세, 자네의 마누라를 포함해서 말이야.”
꿀꺽.
“도, 돌로레스가?!!”
“아니, 이 사람. 왜 자신의 마누라 이름에 그렇게 긴장하는 건가? 하여튼 누가 공처가 아니라고 할까봐 쯧쯧쯧…”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하이잘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