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8화 〉결자해지(5) (238/429)



〈 238화 〉결자해지(5)

무장의 등급은 권투의 체급 차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

플라이급이 아무리 애를 써도 헤비급을 당해낼 수 없는 것처럼 등급이 위에 있다는 것은 무공의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 +가 붙는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번에도 역시 권투로 비유하면 체급 자체는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기량이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차이가 심하면 챔피언과 아마추어만큼 격차가 나버리지만, 적어도 호랑이에게 맞서는 하룻강아지처럼 절망적인 체급 차이보다는 훨씬  해볼 만한 조건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준다면 럭키 펀치 한 방으로 승리를거머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리나는 그것을 거의 붙잡을 뻔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진지하게 승부에 임했다. 그건 검을 마주한 네가  잘 알겠지. 하지만 너는 어땠느냐?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결투를 성사시켜줬는데도 진지하게 임하기는커녕 자신의 패배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잖느냐? 그렇게 승부 자체를 모욕해놓고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그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리한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지금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폰 사건의 모든 책임을 아스트라세가문에 전가하고 괴롭혀 왔다. 솔직히 이것 자체도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은 넘어가 주도록 하지.”


10년 전에 그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그리폰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이리나의 계획에 동참했다.


그 공범자들 속에는 당연히 로가의 아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피가 묻은 말고기를 가져와서 그리폰들을 자극한 범인은 따로 있지만, 이 공범자들이 모든 책임을 그녀 한 사람에게 떠넘겨버리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처벌이 정말로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커딩가 가문의 후계자에게 일어난 일은 이리나가 도의적으로 미안할 수는 있어도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물론, 로가 또한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지만 리한은 굳이 이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세경가끼리 다투지 말라는 마르텔 대모의 명령조차 무시하는 것은 백번 양보해도 용서할 수가 없다. 네까짓 것이 도대체 뭐기에 그런 특권을 누리는 거지? 설마 커딩가 가문이 천년 가문 위에서 군림하는 구름 위에 존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오로지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것밖에 모르는 팔푼이가 무슨 놈의 가주라고!!”


“큭?!”


매서운 질책에 이를 악무는 로가였지만 대꾸할 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왜냐면 그의 말처럼 복수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그동안 많은 절차와 규칙을 무시했던 것이 부인할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은 여기까지다. 네 행동은 선을 넘어도 진작에 넘었어. 이번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도록 해라. 억울하면 너도 네 후계자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려냈으면 되지 않느냐?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이쪽에서 했다고 징징거리는 꼬라지도 도저히 못 봐주겠군.”

씰룩.


“이런 ㅆ…”

리한의 조롱에 눈이 돌아가 버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쏟아내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에 그의 품 속에 안겨있던 이리나가 비틀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쿵!


“죄송합니다, 로가님. 후계자님의 죽음에 대해서는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너…”

“하지만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아무리 저를 가증스럽고 미워하셔도 제 목숨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직 이분의…도련님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 결투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셨다면 대신에  왼쪽 팔을 내어드릴 테니 이것으로 노여움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검을 움켜잡으려고 애썼다.


“…”

그 모습을 잠시 동안 가만히 지켜보는 로가.

“하아. 그냥 내버려 둬라. 어차피 그렇게 해봤자 옆에 있는  소중한 도련님께서 다시 붙여버릴 것 같으니까 말이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후계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맹세는 이미 해버렸으니까 말이야. 지난 일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질질 끄는 것은 나답지 않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확실히 나도 누구를 탓할 처지는 아닌  같아서 말이야.”

의외로 시원하게 자신의 잘못과 결과를 인정해버렸다.


“감사합니다, 로가님. 이 은혜는…”


“인사치레는 됐어. 그럴 정신이 있으면 네 어머니에게 그만 좀 노려보라고 해라. 아주 눈총으로 사람을 잡겠네, 잡겠어.”


“흥!”

오필리아가 삐졌다는 듯이 뺨을 부풀리면서 고개를 홱하고 돌려버렸다.


중년의 귀여움(?)이 살아있는 찰진 리액션.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입니다. 후계자님.”

“무슨 의미지?”


로가의 말에 리한이 시치미를 떼면서 되물어 보았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결투 결과는 받아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편을 갈아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에 당신께서 아스트라세 일가와 함께 래리님을 토벌하려고 한다면…제 검이 무정하다고 말씀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로가님…”

“너는 닥치고 있어라, 에윌루드.”

“네.”


슬그머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했던 존재감 제로의 마법사가 다시 깨갱하면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돌로레스 같은 년을 위해서 싸우겠다니 너도 보는 안목이 없구나.”

“정정해 주십시오. 제 주군은 어디까지나래리님이십니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도록 해라. 안타깝지만 숙부님께서는 그년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야. 지금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온갖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사는 년이 백작 부인이 되면 달라지겠느냐?”


“그런 주군의 모자란 부분을 보필해드리는 것이 가신의 역할이 아닙니까?”

마치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 같은 완고함이었다.


“뭐, 어쨌든 그렇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대화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군요. 그러면 저희는 이쯤에서 실례를…”

“잠깐 기다리도록 해라.”

리한이 머리를 숙이며 떠나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직도 무슨 용무가 남아있습니까?”


“결투를 허락해주는 조건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무슨 내용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떠나려고 하다니 정말로 제멋대로 사는 여자군.”


핀잔을 듣고서 머쓱해진 로가.


“크흠, 딱히 강제성이 있는 조건이라고 하지는 않으셨잖습니까? 하지만…아니, 알겠습니다. 무슨 조건이신지 말씀해주십시오.”

“별것은 아니고  사람에게 보여줄 물건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개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서 차나 한잔 마시도록 하지.”

“흠…무엇을 보여주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생각을 바꾸는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을 겁니다.”

“저, 저도요?”

“닥쳐, 에윌루드.”


“네.”


“후후후후후.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리한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사람을 은밀한 내실로 안내했다.

****




다음 날 아침, 9시.


루돌프의 영결식이 시작되기 1시간 전에 래리일행이 크레센트 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슈킬 가문의 직계. 래리님꼐서 입장하십니다!!”

우르르르르르-

홍해가 갈라지듯이 좌우로 정렬하면서무릎을 꿇는 귀족들.


“래리님을 뵙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모습이 이미 천년 가문의 가주 자리를 계승한 것처럼 위세가 대단했지만, 정작 본인은 마실을 나온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모습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에헤이~ 이 사람들이! 영결식장에서 소란스럽게 뭐하는 짓이야? 다들 일어서, 일어서! 하여튼 다들 지나치게 유난스럽다니까.”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귀족들을 손수 일으켜 세우면서 상황을 수습하고는 자신을 따르는 측근들과 함께 곧바로 루돌프의 관으로 직행해서 헌화했다.

“…세상 야박한 친구 같으니라고.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가버린 건가? 쯧쯧쯧쯧.”


그렇게 애도를 표시한 직후에 유가족들에게도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식에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인. 남편의 일은 정말로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본가의 총력을 동원해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래리님.”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인싸력이 느껴지는 래리.


비록 귀족으로서의 행동거지나 절차와 격식 자체는 좋은 말로도 모범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단점을 상회하고 남을 정도로 따듯한 인간미와 정을 드러내는 것이 그가 수많은 가신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였다.


물론, 리한에게 있어서는 성가신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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