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결자해지(4)
그리고 수직으로 검을 세워서 이리나의 심장에 단숨에 찔러넣었다.
“안돼에에에!!”
천을 찢는 듯한 오필리아의 비명.
하지만 로가는 오랜 친구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비틀어 돌려버렸다.
“내 아들의 복수다.”
푸슈우욱-!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새빨간 피.
검과 함께 들어 올려진 신체가 털썩하면서 지면에 쓰러졌다.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와 흐릿해져 가는 이리나의 눈동자.
“…도…련…님…”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리나!!”
한걸음에 달려온 리한이 자신의 연인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손을 붙잡았을 때는 이미 생명의 불꽃은 꺼져버린 후였다.
“…”
잠시 동안의 침묵.
“…아스트라세 가문의 여식과 정을통하신 겁니까?”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로가가 그렇게 질문해 왔다.
“…그래.”
“사랑하는 여자를 목숨을 거는 진검승부에 내보내다니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겁니까? 차라리 비겁자라고 불려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도망쳤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리한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움찔!
아직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로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로 스산하기 이를 데가 없는 살기.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니, 아니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말이야. 결투는 너의 승리다, 로가. 하나의 목숨에 하나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으니 그리폰 사건의 은원은 확실하게 청산한 셈이지. 천년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명령하겠다. 아스트라세와 커딩가, 두 가문의가주들은 과거의 앙금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시는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맹세하겠습니다, 도련님.”
루돌프가 먼저 무릎을 꿇으면서 대답했다.
“저도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까 미련은 없습니다. 커딩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데 앞으로 두 번 다시는그리폰 사건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됐다.”
리한은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곧바로 자신의 품속에서 빨간색 액체를 담은 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자신의 딸을 끌어안고 있던 오필리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부디 이럴 가치가 있었다고 말씀해주세요, 도련님.”
“아닙니다, 장모님. 세상의 무엇도 이리나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신은 이런 어리석은 고육지책으로 그녀를 희생시키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에 손아귀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로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 번 다시라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을 개방한 리한이 내용물을 머금고 이리나와 입을 맞췄다.
여전히 부드럽지만 차가운 입술.
꿀꺽, 꿀꺽, 꿀꺽, 꿀꺽-
파지지지지직!
“?!!!”
예상하지 못한 돌발 행동을 목격한 대다수의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신체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가슴의 상처가 아물어가는가 싶더니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어리며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서, 설마 저건 엘렉시르elixir??? 말도 안 돼! 벌써 수백 년에 자취를 감춰버린 물건이 어떻게 후계자님의 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에윌루드의 외침.
물론, 진짜 엘릭시르가 아니라 단순하게 색을 낸 포션에 불과했지만, 마스터 코어의 치유능력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그녀를 소생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앗?!!”
악몽을 꾸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커다란 숨을 뱉어내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리나!!”
“정말로 살아났구나, 내 딸!!”
“…도련님?”
“그래, 여기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런 역할을 떠넘겨서 미안하구나.”
“사과하지 말아 주십시오.제가 억지를 부려서 들어주신 부탁이 아니었습니까?”
“이리나.”
“도련님…”
주변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지만, 이런 모습을 굉장히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던 외부자(로가)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
“엘릭시르를 도대체 어디에서 구하신 겁니까, 후계자님?!!”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한 에윌루드에게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새끼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데…”
“현자의 돌을 정제하지 않으면 만들어내지 못하는 물건이 아닙니까? 세상 모든 연금술사의비원. 추악한 자들의 탐욕과 분쟁, 데피리스 교단의 마녀사냥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전해지는.아니,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그렇게 귀한 물건을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고 이렇게 가볍게 사용해 버리시다니요?!!”
“가볍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위해서 가장 값지게 썼지.”
“도련님…♡”
리한이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꼬옥 끌어안으면서 말하자 이리나의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크흠, 크흠, 엄마도 옆에 있었고 엄청나게걱정했는데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도련님만 찾다니 너무 서운해잉~”
“그냥 내버려 두시오,부인. 딸자식 키워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거겠소?”
“…”
정신이 아득해지는 염장질에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도 잠시.
에윌루드가 재차 애원해 왔다.
“그, 그러면 하다못해 엘릭시르가 들어있던 병이라도 저에게 주십시오. 한 방울만, 딱 한 방울만 넘겨주셔도 표본으로 연구할 수 있으니까…”
“어려울 것은 없지.”
“정말입니까?”
“하지만 공짜로 줄 수는 없지. 대가로 너는 무엇을 지불할 수 있느냐?”
“무엇이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개가 되라면 개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디 한번 개처럼 짖어보도록 해라.”
“멍멍! 멍멍멍!!”
리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귀족으로서의 모든 체면을 집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개처럼 짖어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복종의 포즈로 헥헥거리며 시키지도 않은 더러운 애교까지 부려대는 바람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만!시킨다고 정말로 저질러버리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받아라!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지만 어디 한번 재주껏 연구해보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후계자님! 이 은혜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충성충성!!”
“이 박쥐 같은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퍽!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로가가 가짜 엘릭시르를 받아들고서 희희낙락하는 에윌루드의 머리를 세차게 후려치면서 앞으로 나왔다.
“아직도 무슨 볼일이 남아있는 거냐?”
“볼일이라고요?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리한이 모르겠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자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하나의 목숨에 하나의 목숨으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과거가 청산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다시 살려내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만 다시 살려내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지 않으냐?”
“그런 말장난을…”
“계약서를 똑바로 읽어봤어야지. 아니면 사전에 부활 금지라는 조건을 달아놓던가 말이야. 눈뜨고 코를 베어 가는 요즘 같은 세상에 기본 중의 기본 확인 사항이아니냐?”
“큭!”
로가가 이를 악물었다.
“설마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가문을 걸고 맹세한 주제에 말이야.”
“…속아서 말한 맹세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후후후후. 너무 그렇게 속상해하지 말도록 해라, 로가. 성직자가 사용하는 리저렉션과 다르게 엘릭시르는 이제 두 번 다시는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겨질 정도로 말이지. 만약에 네가 결투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나는 이것을 아낌없이 사용했을 거야.”
“별로 위로가 되진 않는군요. 저는 이미 부하들에게 결투에 져서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아스트라세 가문에 어떤 보복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뒀습니다만…”
“글쎄? 내가 알고 있는 주홍 기사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고분고분하게 따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야. 녀석들이 통제되는 이유는 네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네가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하지만 주인이 죽으면 고삐가 풀린 야수들이 복수를 부르짖으며 날뛰는 것을 도대체 누가 말릴 수 있지? 일부러 그런 골칫덩어리들을 모아서 기사단을 꾸린 주제에 퍽이나 뻔뻔한 소리를 하는구나.”
정곡을 찔린 그녀는 순간적을 멈칫했다.
얄밉기는 했지만 리한이 지적한 대로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까 첫 번째 기습은 제법 위협적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