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결자해지(3)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죠.”
이리나의 도발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쭈구리?”
“그나저나 제니아의 암사자라고 불리는 분께서 말이 너무 많으시군요. 설마 지금까지 쓰러트린 무장들이 모두 수다를 견디지 못했던 겁니까?”
“…뭐?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좋아, 좋아. 적어도 입담 하나는 그럴듯하구나. 자고로 상대를 도발하려면 그 정도 입심은 있어야지. 내 검을 가지고 와라!!”
허리를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다가 그렇게 외치자 팔콘 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미리 준비해놓은 무기를 양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이건…”
굉장히 익숙한 외형.
로가가 리한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제 검을 가져다주시다니 준비성이 지나치게 좋으시군요, 후계자님.”
“공정한 승부를 보장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측근분들에게 자작 부인의 지시라고 했더니 군소리 없이 내어주더군요.”
“후후후후. 좋습니다, 약속을 지켜주셨으니 자잘한 문제는넘어가겠습니다.”
스르르르릉!
단숨에 검을 뽑아내면서 마찰이 일어나 불꽃이 튀었다.
“참수검(executioner sword)이다.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마나타이트소재로 만들어서 목을 베는 맛이 일품이지.”
이리나도 이에 질세라 칼끝을 상대의 머리로 겨누는 옥스(Ochs)자세를 취했다.
“…피리오스입니다.”
‘이 년이?’
그녀의 미간이 씰룩거렸다.
왜냐면 그 이름의 주인은 들고 있는 검이 아니라 그리폰사건의 발단이 되어서 처분당해야 했던 이리나의 그리폰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관계자이자 피해자의 유가족인 로가가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이보다 완벽한 도발은 있을 수가 없었다.
“과거를 확실하게 청산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네 목숨으로 말이야. ”
“죄송하지만 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네년의 실력을 증명해 봐라!!!!”
“결투 시작!!”
로가의 호령이 끝나기 무섭게 리한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
선공을 가한 것은 이미 달려들 준비를 끝내고 있었던 이리나였다.
“빙혼,일섬氷魂, 一閃!!”
슈우우우우욱!
빛살처럼 쏘아져 들어가는 한 줄기 섬광이 로가의 미간을 노렸다.
완벽한 일직선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바람에 다가오는 속도와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찌르기 공격.
단숨에 목숨을 취하려는 일격필살의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에 감히 좌시하지 못하고 재빠르게 보법을 사용해서 회피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화비산百花飛散!!!”
꽃잎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 여러 개의 잔상으로 흩어진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말았다.
‘페이크?’
예상하지 못한 허초에 당황하는 로가.
급하게 실체를 찾아내려고 사방을 경계했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바바바바밧!
재빠른 스텝으로 그녀의 사각으로 파고 들어가 끌어모은 내력으로 무투기를 출수하는 이리나.
“난영亂影, 빙파참!!!”
“거기였느냐?!!”
뒤늦게 살기를 감지한 로가가 참수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완벽하게 허를 찌른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콰카카카카캉!!
한순간에 수십 번의 검격을 주고받으면서 충돌한 두 사람이 서로를 통과하며 뛰쳐나왔다.
“!!!!”
그리고 순식간에 뒤돌아서서 자세를 고치며 상대를 견제했다.
결과가 나온 것은 그 직후.
푸슉!
“…”
이리나의 새하얀 뺨에서 면도날로 베인 것처럼 피가 튀어 올랐다.
그래도 상대에 비하면 작은 찰과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파바바바바바밧!!
“크으윽!”
아킬레스 건이 끊어진 로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팔,다리, 어깨, 복부, 얼굴.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수많은 자상이 전신의 살점을 뜯어내면서 대량의 혈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참수도가 후들거릴 정도로 심각한 부상.
하지만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이리나의 표정은 조금도 밝지 못했다.
‘결정타를 날리지 못했어. 완벽한 타이밍에 모든 급소를 노려서 공격했는데 설마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모조리 빗겨낼 줄이야.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버리다니…’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크크크크크, 크흐흐흐,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리던 로가는 실성한 사람처럼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광천 대소를 했다.
그 순간 맑은 에메랄드색으로빛나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피처럼 빨갛게 물들어갔다.
퍼큘리어 초회복.
대량의 내력을 소모해서 수많은 자상을 한순간에 아물게 하고는 흘러내리는 피를 고열로 증발시키며 진홍의 오오라로 전신을 휘감았다.
자양신공紫陽神功과 혈풍血風도법.
동양에서 자양사신과 혈마라고 불리는 희대의 대마두가 창안했다는 도법이 바로 로가가 사용하는 무공이었다.
“정말로 제법이구나. 이상할 정도로 나를 도발한다고 생각했더니 전부 이 한 방을 노리고 설계를 했던 것이었다니 말이야. 싸우기 전에미리 워밍업을 한 것도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려고 그랬던 것이냐? 덕분에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 버릴 뻔했구나.”
“…”
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잡은 손아귀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으드드득-
상대의 말대로 이것은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상당한 내력을 소모시켰다고 해도 상처를 회복한 이상 로가의 전투력은 뤈래대로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제는 방심하지 않고 진지하게 결투에 임할 터.
그녀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리한을 곁눈질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관전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는 이‘작전’을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을 억지로 밀어붙인 것은 자신의 의지.
‘도련님…’
“후우우--”
이리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본 로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해. 우리 모자란 딸이 너의 반만 따라갔더라도 미련 없이 가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일선에서 물러났을 텐데 말이야.”
후우우우우우웅!
풍차를 돌리는 것처럼 참수검을 한 바퀴 휘둘러서 역수로 고쳐 잡았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워. 이렇게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내 손으로 죽여버려야 한다니 말이야!!!”
투콰아아아아아아앙!!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지면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서 돌진해 들어갔다.
****
콰콰콰쾅!!
“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충돌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간 이리나가 허공으로 새빨간 피를 토해냈다.
금강투합체가 깨지는 순간에 산산이 부서지는 갑옷과 함께 공중을 부유하는 그녀.
하지만 로가는 그것마저도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듯이 돌진해 들어와서 오른쪽 다리를 직각으로 번쩍들어 올렸다.
“파산퇴破山腿!!!”
쿵!!
“커흑!!”
사바톤의 뒤꿈치로 복부를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으드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버리면서 움푹 꺼져버렸다.
후우우우웅!
그러는 와중에도 검을 휘두르면서 반격을 가하는 이리나였지만 이미 날카로운 예기는 사라져 버렸다.
로가는 살짝 물러나서 가볍게 피해버린 다음에 다시 한번 그녀를 걷어차 버렸다.
퍽!
“크으으으윽!”
“그, 그만…”
딸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보다 못한 오필리아가 개입하려고 했지만, 루돌프가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참으시오, 부인.”
“하지만…”
“도련님을 보시오. 지금, 이 순간을 누구보다 견디기 힘드신 분께서 자신을 억누르고 계시지 않소?”
그의 말대로 리한은 엄청난 분노를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손에 얼마나 강하게 힘이 들어갔는지 어깨 소매로 피가스며져 나와서 빨갛게 물들어갔다.
만약에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로가를 100번은 찢어 죽였을 기세.
그만큼 결투는 일방적이었고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배, 백야白夜!”
“혈류성하血流成河!!!”
간신히 끌어올린 내력으로 발동한 이리나의 무투기가 새빨간 혈무에 덮여버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쿵!
이제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리는 그녀.
하지만 로가 또한 상당히 지친 모양이었는지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이제 됐어. 그만 포기하도록 해라! 저항하지 않으면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까 말이야.”
이 말에 이리나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절대로…여기에서 포기할 수는…크으으윽!”
검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다시 한번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휴우우우- 이 짓도 더 이상은 못해먹겠군.”
길게 숨을 뱉어서 호흡을 가다듬은 로가는 천천히 다가와서 자신의 참수도를 들어 올렸다.
“잘 싸웠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