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결자해지(2)
“후계자님을 뵙습니다.”
오필리아는 마치 꽃잎이 내려앉는 것처럼 우아하게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였다.
“큭.”
딱 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깨무는 로가였지만, 아무리 그녀가 막 나가는 성격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얼치기는 아니었다.
쿵!
“후계자님을 뵙습니다!!”
“후, 후계자님을 뵙습니다!”
그녀가 무릎을 꿇자 눈치를 보고 있던 에윌루드도 엉거주춤 따라서 머리를 숙였다.
“훗.”
코웃음을 친 리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으로 걸어가서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광경이었지만 맞서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왜냐면 그는 아직 아슈킬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마르텔 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사실이 변하지 않을 터.
로가들이 충성을 맹세한 래리가 공식적으로 리한과 적대 관계를 표명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뛰쳐나갔을 테지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계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반역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스트라세 가문의 손바닥 안이었다.
“세 분 모두 머리를 들어주시오.”
“이게 대체 무슨…”
“쓸데없는 질문은 듣지 않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어떻게 아스트라세 가문에 의탁하고 있는지는 지금 당장은 중요한문제가 아니니까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그렇습니다.”
“마담 로가???”
로가가 너무 쉽게 수긍해버리자 에윌루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후계자의 말이 맞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이런 일을 예상했어야 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왜? 어떻게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장본인에 대한 거야. 3년 전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그녀의 머리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과거의 후계자는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하고 순진한 청년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길을 가다가 실수로 밟아 죽인 개미한 마리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훌쩍거리는 부류의 사람.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겉모습은 똑같을지 몰라도 말투와 태도, 뿜어내는 카리스마 자체가 태생부터 다른 생물 같았다.
마치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피조물 같다고 할까.
이미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면 우유부단한 래리보다는 그가 더 천년 가문의 주인으로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가 등장한 시점에서 눈치를 채셨을 테지만 이리나 양과 마담 로가의 결투를 허락해 드리는 것은 저의 재량입니다.”
“…과거하고는 견해가 많이 달라지셨군요.”
“이제 다 큰 성인이니까요. 물론 어른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 여자아이에게 지나친 책임을 물어 따지는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감수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녀석이?’
로가의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말하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이라는 것은 그리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리나를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당돌하기 이를 데가 없는 도발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속 시원하게 싸움을 거는 것이 묘한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오필리아님께서 이미 말해주셨을 테지만 제가 이 결투의 참관인 겸 신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설마, 적당히 봐주라는 소리는 아니시겠죠? 만약 그렇다면…”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담 로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어쩐 제한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1대 1의 공정한 진검 승부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 대답에 두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나오셔야지. 아주 마음에 들어!!”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가주님의 장례식을 목전에 두고 목숨을 거는 칼부림이라니요? 초상집에서 시체를 늘릴 생각이십니까? 오필리아님. 뭐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수용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그저 후계자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상식에 호소했던 에윌루드는 터무니없는 오필리아의 대답을 듣고 망연자실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로가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기는 하군.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 오필리아가 이렇게 태연하다니 말이야.’
당사자들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서 상당히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녀가 바라마지 않았던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좋습니다, 판을 깔아주시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하지만 먼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저한테 이런 기회를 주시는 ‘조건’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건 결투가 끝난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설마, 거절할 수 없는 종류의 제안이라는 것은 아니겠죠?”
“후후후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충분히 들어볼 만한 내용이라는 것은 장담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전적으로 두 분의 자유입니다.”
“저, 저도 포함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에윌루드님은 오필리아님과 함께 꼭 결투의 참관인으로 참석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아니,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커헉?!”
그렇게 말하면서 슬그머니 도망치려고 했지만 로가에게 목덜미를 붙잡혀서 강제로 주저앉혀졌다.
“좋습니다, 후계자님.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
잠시 후.
일행은 팔콘 전사들의 철저한 호위 속에 걸음을 옮겼다.
태연하기 이를 데가 없는 로가하고는 다르게 시종일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에윌루드.
일단 측근들에게 연락할 수 있게 해줬지만 사실상 인질이나 다름없는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결투장.
앞서 장담한 대로 워밍업을 마친 이리나는 완벽한 임전태세로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녀의 옆에서 세컨드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 루돌프님?!!”
“휴…후계자님이 눈앞에 등장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살아있었군.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짜였다니. 이런 빌어먹을 자식!”
“입이 더러운 것은 여전하시군, 마담 로가.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에윌루드님. 바쁘신 와중에 저의 장례식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표정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뻔뻔함에 이제는 황당함을 넘어서 기운이 빠질 지경이었다.
“끄응…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보나 마나 뻔하지. 이제 래리님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겠다는 소리가 아니면 뭐겠어? 하여튼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딱이라니까?”
“후후후후. 우리 아스트라세 가문을 얌전한 고양이라고 표현하다니 그동안 너무 오래 참기는 했던 모양이로군.”
“…그래서 이제는 선봉 가문의 본색을 드러내시겠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오늘 너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는 거야. 앞으로 나서라, 이리나.”
“네, 아버님.”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한 이리나는 새하얀 백색의 안광을 빛내며 로가와 대칭을 이루는 것처럼 마주 섰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기도.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짜릿짜릿한 살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이미 무아지경에 빠져서 흡사,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네. 또래에 적수가 없다는 말이 과언은 아닌가 봐? 물론, 그래봤자 어디까지나 어린 녀석치고는 괜찮아 보이는 수준이지만 말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코다칠 것이다.”
루돌프가 대신 경고했지만 그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대전 상대도 격이 맞아야 재미가 있지. 기왕에 싸울 거라면 딸을 앞세우지 말고 본인이 앞으로 나서는 것은 어때? 자신이 없다면 둘이 함께 덤벼도 상관이 없는데 말이야.”
“여전히 광오하군.”
하지만 허풍은 아니었다.
로가의 무장 등급은 대외적으로 알려지기를 A급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A+에 도달했을 거라는 것이 지배적인 중론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리나와 A급 최상급에 도달해 있는 루돌프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격돌한다면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압도적으로 풍부한 실전 경험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죽인 무장의 숫자는 최소한 세 자리 숫자를 넘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