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결자해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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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한과 이리나가 텐트 속에서 아이 만들기에 힘을 쓰고 있을 무렵.
고고한 달빛을 등지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었다.
마치 체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삼나무 꼭대기의 여린 가지에 사뿐하게 발을 딛고 선 여인.
“정말로 굉장해…평범한 사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회복력까지 이렇게 대단하다니. 오히려 하면 할수록 힘이샘솟아 오르는 것 같잖아?”
밑에 깔린 여성이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쏟아내는 교성에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이 신비로운 여인이야말로 정체불명의 힘으로 리한에게 정기를 빨아낸 당사자.
“덕분에 요력도 거의 회복되었어. 꿀꺽, 언니를 찾는 일이 급하지만 않았더라도 은혜를 갚고 떠나는 건데…”
연분홍색의 투명한 입술을 살며시 어루만지면서 아쉬움을 토로한 여인은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슈우우우우우욱-
“다음에 다시 뵐 날을 고대할게요, 서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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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다시 돌려서 루돌프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하루 전.
아스트라세 가문의 안주인 오필리아는 두 가문의 가주를 내실로 초대했다.
화려한 식탁.
발소리조차 울리지 않는 메이드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차와 다과를 세팅해 주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동방교역소에서 어렵게 구한 다홍포 차예요. 부디 두 분의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아,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안주인의 공손한 대접에 에윌루드가 목례하면서 대답했지만, 로가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고 있다가 자신의 눈앞에 채워진 찻잔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꿀꺽꿀꺽꿀꺽꿀꺽-
쾅!
펄펄 끓는 뜨거운 차를 단순에 비워버리고 테이블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하게 내려놓는 그녀.
“…”
덕분에 분위기는 험악해졌지만 오필리아는 눈썹 하나도 꼼짝하지 않으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마. 나를 여기에 부른 이유가 뭐야?”
“로가님…읏!”
찌릿!
실례되는 그녀의 행동에 에윌루드가 눈치를 주려고 했지만 매섭게 째려보자 본전도 찾지 못하고 깨갱 하면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에 오필리아는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후. 불같은 성격은 옛날하고 변한 게 없네. 아무리 소원했다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야?”
“흥, 그나마 옛정을 생각해서 측근도 없이 이렇게 으슥한 곳까지 따라와 준 거야.”
로가의 지적대로 이 방은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응접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폐쇄적인 환경인 데다가 외부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장소였기 때문에 대화가 새어나갈 염려가 없는 은밀한 공간.
하지만 안주인은 시치미를 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 옛날에는 사소한 일로 꿍얼거리지 않았으면서 괜히 그러네. 로가도 세월이 흐르니까 변하는구나.”
“이게 전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딸년 교육을 제대로 시켰어야지.”
우뚝-
휘오오오오오-
“지금 내 앞에서 우리 가족을 모욕하는 거야?”
스산한 살기를 피워올리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눈썹 하나 까딱할 상대가 아니었다.
“흥,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빌어먹을 딸년을 여기로 데리고 오도록 해. 내 검을 받아낼 배짱이 있다면 지금 한 말을 취소해주지. 과거도 깨끗하게 청산해 주고 말이야.”
“좋아.”
“그러면 그렇지. 어머니 치마폭에나 숨어있는 년이 무슨 배짱으로…뭐라고?”
로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 솔직하게 말해서 이제 그리핀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던 참이었거든. 잘못은 모두 함께 저질러놓고 책임은 우리 가문에게만 떠넘기는 것도 신물이 나. 솔직하게 말해서 세경가끼리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대모님의 말씀만 아니었더라도 이 케케묵은 은원을 여기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거야.”
“하하하하하! 의외로 세게 나오시는데? 범생이 나리들께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마음에 들어. 루돌프가 죽고 나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리신 건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두 분 모두 고정하시고…”
“너(에윌루드님)는 닥치고 있어(세요)!”
“네, 닥치고 있겠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중간에서 말리려고 했던 에윌루드는 두 사람의 일갈에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조용하게 차를 홀짝거렸다.
“좋아, 좋아. 정정당당하게 싸워주시겠다는데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말이야…당사자는 어디에 있지? 아까 전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설마, 어디로 빼돌리고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결투장에서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말에 로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벌써? 아무리 그래도 준비성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마치 처음부터 나하고 결판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나로서는 오히려 대환영이지. 솔직하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걷어찰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거든.”
“좋아,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쿵!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까 지금 당장 결투장으로 안내하도록 해! 오늘이야말로 아주 끝장을 내주도록 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는 그녀였지만 오필리아는 그런 텐션에 맞장구를 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으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람 김빠지게…”
“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그분께서 금방 오실 테니까 말이야.”
“…그분이라니?”
“결투가 공정해지려면 심판이 있어야지.”
“심판??? 뭐야, 겨우 그런 문제라면 여기에 있는 에윌루드 녀석으로 하면 되잖아.”
“겨우?!…아, 아니. 그보다 제가 어떻게 그런 중차대한 역할을…”
“불만 있어?”
“없습니다.”
가까운 주먹 앞에서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빠르게 꼬리를 내리고 굴복해버리고 말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판을 따로 초청한 것은 루디아브 가문이 자격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감히 장담하는데 이번 결투에 있어서만큼 이분보다 심판의 역할에 어울리는 분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이분이 허락해주시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결투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풋, 허락이라니 너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오필리아. 설마 그 심판이라는 사람이 아슈킬 가문의 관계자라도 된다는 거야?”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뭐?”
태연한 대답에 로가는 살짝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설마 래리님께서? 아니, 아니. 도착하셨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지. 게다가 그분께서 이런 일을 허락해주실 리도 없고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수수께끼는 집어치워.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그분보다 높은 분이라는 사실만 가르쳐 줄게.”
“…설마 마르텔 대모님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고. 혹시…에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돌로레스님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당연한 소리지. 걱정하지 않아도 그 빌어먹을 년을 래리님보다 위로 보거나천년 가문의 안주인으로 인정하는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을 테니까 안심하도록 해.”
“?!!!”
“…크흠, 크흠. 뭐, 이해하지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지나친 소신 발언 같은데…”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해버리는 오필리아 떄문에 두 사람은 살짝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똑똑똑!
그 순간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도착하셨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와 주십시오. 후계자님!”
‘후계자?’
로가와 에윌루드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모양의 의문 부호가 그려지기가 무섭게 하인들이 문을 양쪽으로 활짝 펼치며 화제의 주인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다, 당신은 설마…”
알아보지 못하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는 상대의 등장에 경악하는 두 사람.
3년 전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모습에 트레이드 마크인 불꽃 모양의 흉터를 자신의 눈가에 선명하게 새기고 있는 인물이 씨익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모두 오랜만이로군요.”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왜 그렇게 놀라는 겁니까? 루디아브 자작. 제가 살아있어서 놀라는 겁니까? 아니면 아르고스 라인의 감시를 피해서 제니아에 들어와 있는 것에 놀라시는 겁니까?”
리한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 그게 아니라…그러니까 그게.”
“…기가 차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두 분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다음 순간에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어라. 감히 천년 가문의 후계자를 눈앞에 두고도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