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H이벤트 포함)월하정인, 그리고 결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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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30분.
크레센트 문, 아스트라세 가문의 저택.
제법 늦은 시간이지만 제니아 전역에서 몰려온 수많은 조문객이 빈소를 찾아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
영결식이 열리기 전까지는 아직 사흘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조문객들은 슬픔에 젖은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하인들에게 안내를 받아서 자신들이 배정받은 숙소로 순순히 걸음을 옮겼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시군요, 이리나 양.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에게 그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검은 베일을 들어 올려서 저에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상갓집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복장.
파란 곱슬머리의 미남이 새하얀 치아를 반짝거리면서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
“후후후후. 쑥스러워하시는 모습도 사랑스럽군요.”
쑥스러운 게 아니라 안중에도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는 무한한 자기 긍정을 뽐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시는 모양이니까 함께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시도록 하죠. 제가 에스코트를…”
탁!
그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무엇인가에 튕겨 나갔다.
“에스코트를…”
탁!
“저기…”
탁!
남자는 이마에서 진땀을 흘리며 평소보다 3배 크고 빨갛게 부어오른 얼얼한 손등을 어루만졌다.
“크흠. 레이디는 원래 튕기는 것이 매력이라고 하지만 이건 지나치신 것은 아닌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다음에는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어.]
“히이이이이익?!”
전음으로 심장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겁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눈치를 보다가 쌩하고 줄행랑.
작은 해프닝에 흥미를 느끼고 구경하던 조문객 몇 명이 실소를 터트렸다.
물론, 이리나하고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지만.
잠시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상주 노릇을 하고 있던 랜달이 슬그머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단한 용자가 아닙니까? 빙면설화라는 누님의 별호를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저 남자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관심 없어.”
“물론 그러시겠죠. 누님에게는 도련님만 보이실 테니까요.”
찌릿!
매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자 뱀과 마주친 개구리처럼 움찔했다.
“크흠! 그, 그래도 유비무환이라고 했으니까 일단 알고 계십시오. 저 친구는 시바레 백작이라고 합니다. 백작이라고 해도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리나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뭐, 옆에 있는 제가 봐도 최악의 추파기는 했습니다만…생각보다 심성이 나쁜 친구는 아닙니다. 나름대로 누님을 위로해드리려는 마음도 있었을 테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아주십시오.”
“이상하게 감싸고 도는군.”
“사실, 김나지움 시절의 동기입니다.”
“그래서?”
네 친구라서 어쩌라는 거냐고 물어보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랜달은 가볍게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보기보다 재주가 많은 친구입니다. 세상에 기인畸人이 존재한다면 저런 부류의 녀석들을가리키는 거겠죠. 뛰어난 무장도, 마법사도, 가문이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만 언젠가는 자신의 방식만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사실 도련님만 아니었으면 저 친구를 누님에게 소개해드리려고 했는데 처절하게 퇴짜를 맞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서…커헉?!”
퍽!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복부에 강력한 스트레이트가 꽂혀 들어갔다.
조문객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사각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랜달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배를 붙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포, 폭력 반대…”
“코제트가 많이 지친 모양이야.”
“…네?”
“어린 나이니까무리도 아니지. 어머니와 함께 침소로 돌아가라고 이야기 하겠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상주인 네가 혼자서 빈소를 지키라는 소리야. 내일 정오까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그의 표정이 사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누님! 아무리 야간이라서 뜸해졌다고는 하지만 내일 정오까지 교대 없이 지키고 있으라는 것은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누님? 누님?? 누니이임?!!!”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리나는 사뿐히 즈려밟고 오필리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어머♡ 밤새도록 혼자서상주 노릇을 해주겠다니 우리 아들 대견하구나. 정말로 다 컸네. 이제는 정말로 그이의 자리를 물려받아도 되겠어.”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저에게 맡겨주세요. 하. 하. 하. 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정말로 배때지를 뚫어버리겠어.]
“저, 저에게 맡겨주세요. 하. 하. 하.”
마지못해 대답하는 랜달의 눈가에는 조그마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런 남동생을 내버려 두고 이리나는 두 사람을 에스코트해서 빈소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엄마하고 잘래? 코제트.”
“하우으으. 저하고 같이 자고 싶다니 어머님은 어리광쟁이시로군요.”
여동생은 역시나 피곤했는지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눈을 비볐다.
“어리광쟁이라니 너무해! 엄마는 그저 귀여운 딸 모두에게 둘러싸여서 잠들고 싶을 뿐인걸…”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한 기대를 품으며 이리나를 쳐다보았다.
“편하게 주무십시오, 어머님.”
“체에에에엣~ 매정해.”
오필리아가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면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짓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주름 한 점 없이, 애교가 허락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살짝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 곤란한 점이었다.
“잠시 침실에 들렀다 오겠어요. 어머니.”
“아직도 줄리양과 스코트 경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거야?”
줄리양과 스코트 경은 코제트가 아끼는 애착 인형들이었다.
“어머? 아직도라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언니? 이제는 충성스러운 스코트 경만 있어도 충분하다고요!”
피식.
“성장했구나.”
“지, 지금 깔보신 거죠???”
“싫어어어~ 귀여운 우리 딸들이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영원히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말고 옆에 있어주렴? 제바아아알~~”
“뺘, 뺨을 비벼대지 마십시오, 어머님! 체통을 지키세요!”
“아이, 참. 어머니가 제일 어리광쟁이예요!!”
오필리아는 티격태격하는 자매를 양팔에 끌어안고 격렬하게 부비부비를 해댔다.
“어, 어쨌든 잠옷으로 갈아입기도 해야 하니까 먼저 실례할게요.”
그렇게 말한 코제트는 얼굴 가득히 키스 마크가 새겨진 상태로 휘청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반면에 손수건을 꺼내서 조용히 닦아내는 이리나.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어머님. 편히 쉬십시오.”
“잠시 기다리렴.”
“…무슨 일로…읏?!”
기습적으로 뺨을 붙잡혀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다시 굿나잇 키스에 시달리는 것이 아닐까 경계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오필리아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여는 그녀.
“후후후후. 이제는 정말로 다 컸네. 어린 시절의 모습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정말로 어엿한 숙녀가 되어버렸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오늘 밤에 도련님에게 안기려는 거지?”
“?!!!”
너무 놀라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 어떻게 그걸…”
“후후후후후. 다른 사람은 속여도 엄마 눈은 못 속이지. 엄마가 괜히 엄마겠니? 네가 다른 사람에게는 빙면이라는 이상한 별명으로 불리는지 몰라도 엄마에게는 그저 감수성 풍부한 딸내미에 불과하단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
오필리아는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의 따듯한 온기에 잠시 말을 잊지 못하는 그녀.
“도련님이 그렇게 좋니?”
“읏?!!”
이번에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개졌다.
“에휴. 반응을 보니까 이제는 누가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해도 안되겠구나. 리한 도련님이라. 뭐, 그분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엄마도 반대는 하지 않을게. 아무리 우리 딸이 아까워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어버릴 수는 없지 않니?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던 네 중2병 상사병이 다시 도져버리게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어, 어머님.”
아스트라세 가문에서는 불문율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흑역사를 이야기하자 당황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반드시 알아두렴.”
“무엇을…”
오필리아가 딸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