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선전포고(5)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
웅성웅성
생각 같아서는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하며 모르는 척 외면해버리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마지못해서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에 갑작스럽게 벌컥 열려버리는 마차의 문.
“안에 있었으면서 어째서 대답하지않았던 거지?”
“죄, 죄송합니다. 마담 로가! 일단은 내려서 대답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뭐, 좋아. 시시콜콜한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말이야. 일단 합승하겠다. 불만은 없겠지?”
‘그냥 자신의 마차로 이동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사양하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말로만 하지 말고 들어갈 수 있게 비켜라.”
그렇게 말하고는 에윌루드를 밀쳐버리며 안으로 들이닥치는 로가.
철그럭거리는 흙투성이 사바톤(sabaton)이 바닥에 깔린 깨끗한 백색 융단에 지저분한 발자국을 남기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장례식에 저런 복장을 입고 오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숨이 턱 막히는 주홍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는 그녀.
체구 자체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부담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차 내부는 답답하고 땀내 나는 건장한 장정 스무 명이 탑승해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크고 넓었지만, 차라리 그들과 비좁은 공간에 부대끼면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젠장. 내 프라이버시 공간을 이렇게좌불안석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목이 마른 데 시원한 마실 것이라도 하나 내오도록 해라.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아, 네 물론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
마치 자신의 마차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을 차지하고앉아서 턱짓으로 에윌루드를 부려먹는 그녀.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백전연마百戦錬磨의 무시무시한 암사자 같은 기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꿀꺽.
‘내가 이래서 무장을 싫어하는 거야. 하여간에 상식이 없어요, 상식이…’
외모만 놓고 보면 로가도 미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오는 금색 단발의 곱슬머리.
사나운 눈매에 어울리지 않는 에메랄드 빛깔의 투명한 눈동자.
현대 사회의 귀부인답게 상당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얼굴 중앙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끔찍한 흉터를 전사의 훈장이라며 일부러 남겨두고 있을 정도로 뼛속까지 타고난 여장부였다.
“사나그도 오랜만에 찾아왔더니 감회가새롭군. 그렇지 않으냐?”
“네, 네. 그렇습니다.”
“사내새끼가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남자답게 씩씩하게 대답해야지.”
“아니, 그게…”
“똑바로 대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로가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에윌루드는 죽을 맛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방음 마법을 걸어놓았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지금 대화도 바깥으로 고스란히 새어나갔을 터.
마차를 호위하는자신의측근들이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어린애 취급하다니….’
지위만 보면 대등한 관계지만 문제는 로가가 그의 어머니와 친구 사이이자 갓난아기 시절부터 돌봐줬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존댓말이 어색할 정도로 하대가 자연스러운 상태.
그래도 이제는 제니아 최대의 가문 중 하나를 이끄는 당당한 수장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입이 찢어져도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이 구역에서 굉장히 유명한 XXX였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루돌프 녀석. 하필이면 뒈져도 이런 타이밍에 뒈지다니 마지막까지 짜증 나는 놈이었다는 말이야. 라프텔 호수에 창궐한 몬스터 군단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 타이밍에 진군을 멈춰야 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세경가의 가주를 향해서 뒈졌다는 말이 뭐야? 뒈졌다는 말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로 그렇습니다! 뭐, 그래도 일단 개미 한 마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밀봉해 놓았으니까 느긋하게 처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아하하하하하하하-”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처웃는 거야? 돌았냐?”
에윌루드가 어색한웃음소리를 터트리자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다시한번 망신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굴하게 웃는 상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로가의 불같은 성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는 굉장히 다양하며 무궁무진하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만 꼽아보라면 역시 가장 유명한 그리폰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때 당시에 그녀의 후계자는 이 소동에 휘말려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도 마르텔 대모가 자신을 대신해서 정의를 실현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질을 억눌렀지만, 예상하지 못한 리한의 개입으로 루돌프 부녀가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고 풀려나자 분노가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로가는 대모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중간에 A급의 호위 무장 두 명이 검을 빼서 막아섰지만 주먹 하나로 때려눕히는 괴력을발휘.
대모의 멱살을 단숨에 움켜쥐려고 했지만 그 순간 홀연히 나타난 평온의 기사 애쉬가 그녀를 빙그르르 회전시켜서 바닥에 머리부터 꽂아버렸다.
그 충격으로 사흘을 기절.
원래대로라면 현장에서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하극상이었지만, 마르텔 대모는 자식을 잃어버린 로가의 심정을 이해해주며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쳐주었다.
하지만 불문에 부쳐줬다고 해서 소문이 나지 않을 수는 없는법.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꼭지가 돌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유명해져서, 내추럴 본 미친개 집안이라고 일컬어지는 투크 가문에서조차 한 수 접어주는 XXX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도 로가는 사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르텔 대모와 리한을 향한 분노를 쿨하게 털어버린 상태였다.
타고난 여장부답게 애쉬에게 한 합에 당해버렸다는 사실을 듣고 껄껄 웃으면서“역시 평온의 기사는 대단하군!”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
오히려 그녀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스트라세 가문이었다.
왜냐면 분풀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뒤끝을 남기고 싶지않았던 그녀는 목숨을 걸고 진검 승부로 결판을 내자고 여러 차례제안했지만, 모조리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루돌프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세경가끼리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말라는 대모의 명령을 고지식할 정도로 잘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라고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갈 곳을 잃어버린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
“마지막까지 비겁한 새끼 같으니라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 손에 죽어도 되잖아? 천하의 루돌프가 객사가 뭐야? 객사가…”
투덜거리는 목소리에서는 어쩐지 애증의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뿌리부터 마법사인 에윌루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무장의 감수성이었다.
‘수틀리면 한 판 싸우자니 무슨 싸움닭도 아니고. 광견 투크 가문도 그렇고 제니아에는 왜 이렇게 호전적인 가문이 많은지 모르겠어.’
사실, 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루디아브 가문이 그리폰 사건에서 아무런 피해르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스트라세 가문은 무장 집안치고는 굉장히 신사적인 편.
제니아의 선봉 군단이라는 무시무시한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설영빙천공을 수련하여 굉장히 이지적인 모습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사 집안인 루디아브 가문하고도 굉장히 이야기가 잘 통하는 편이었다.
심정적으로는 로가의 커딩가 가문보다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
그래도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의 욕을 계속 듣는 것은 불편했기 때문에 대화의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 그러고 보니 최근에 따님께서 본가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양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흥, 그 못난 년.”
자식의 이야기가 나오자 로가의 표정이 한층 사납게 일그러졌지만 에윌루드는 그녀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왜냐면 표정하고는 다르게 날카로운 기도가 순식간에 누그러졌기때문이었다.
“바깥세상을 경험한 게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작스럽게 귀가해서 신부 수업을 듣겠다고 난리를 치더군. 뭐, 그래봤자 작심삼일이겠지만말이야.”
여전히 좋은 말은 나오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마저 다소 온화해졌다.
“그렇습니까?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저도 엘리자베스 양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았다면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커딩가 가문의 경사로군요.”
“후후후. 우리 사이에 무슨 아첨을 그렇게 하는 것이냐? 하지만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세상만사가 이렇게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다행스럽게도 화제를 제대로 선택한 모양이라서 불편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 때.
“로가님! 에윌루드님! 오필리아님과 자제분들께서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다시 날카로운 기도를 뿜어내는 그녀.
“오필리아가 직접…?”
잠시 후, 그들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스트라세 가문의 구성원들과 대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