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선전포고(2)
“당연히 마이 허니를 만나기 위해서죠.바늘 가는 데 실이 빠질 수 있겠어요?”
“그, 그래.”
예상했던 대답이기는 하지만 직접 들으니 살짝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요?”
“김나지움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있냐는 것이다. 한창 학기 중일 텐데 혹시 말로만 듣던 등교 거부…”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혹시 불량소녀가 되어버릴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어린 시절의 이리나하고 판박이인데…”
“불량소녀라서 죄송하군요. 도련님.”
휘오오오오오-
배후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리나가 차가운 북풍한설을 일으키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리한은 당황하지 않고 능청을 떨었다.
“거짓말은 아니잖느냐? 흑흑흑흑.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는군. 왕따 주동자였던 주제에.”
“윽?! 그,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으으으으. 죄, 죄송합니다.”
아킬레스건처럼 흐물흐물해지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크흠, 크흠! 저를 빼고 둘만의 추억을 회상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굉장히 불쾌하네요. 참고로 마이 허니, 저는 언니하고 판박이가 아닙니다. 왜냐면 나이 대비로 키가 1cm 더 크니까요!”
“…가슴은 1cm 작지만.”
이리나가 중얼거렸다.
“꺄악!!! 비, 비겁하세요. 언니! 레이디 협정 위반이에요! 소녀의 치부를 그렇게 가볍게 발설하다니…그것도 하필이면 마이 허니 앞에서!!”
의기양양하게자랑을 늘어놓다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 드러나 버리자 발을 동동 굴렀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 어쨌든 제가 본가로 돌아온 이유는 모두 마이 허니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고?”
“그래요!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편지에 마이 허니가 살아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거든요. 이런 말을 듣고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장래를 약속한 정혼자로서 마중은 못하더라도 서방님이 크레센트 문에 방문하시는 것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핑계로 등교를 거부했다는 소리군.”
“아니라니까요!! 마이 허니가 심술궂어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리한의 놀림에 다시 한번 방방 뛰었다.
“칫, 어머니는 쓸데없는 참견을…”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이리나로부터 혼탁한 속내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군. 어린 시절의 이리나를 닮아서 그런가? 내가 진짜로 경험한 과거도 아닌데 이상하게 호감이 있어. 이렇게 귀여운 딸이라면 인간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진 것을 깨닫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바꿔서 자상한 표정으로 머리를쓰다듬어줬다.
“후후후후. 그렇게 화내지 마라. 농담이니까 말이야.”
“크흠, 크흠!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용서해 드리도록 하겠어요. 헤헤헤헤.”
조금 달래자 금방 화를 누그러트리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이 모습에 이리나가 다시 한번 아미를 찡그렸다.
“여동생에게는 굉장히 자상하시군요? 도련님.”
“말투에 가시가있군. 하지만 그렇게 질투하는 모습도 귀엽구나♡”
“읏?!”
대번에 얼굴이 빨개졌다.
“화는 그만 내고 이리로 와서 앉아라.”
“안돼요. 마이 허니는 언니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요!!”
오른쪽 무릎을 두드리면서 꼬셨지만 코제트가 쪼르르 달려와서 선착해 버렸다.
이 모습을 보며 아쉬움과 답답함이 뒤섞인 한숨을 뱉어내는 이리나.
“…하아. 이번에는 저도 동생이 하는 말에 동감합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자매 중에서 한 명만 선택해주세요, 도련님.”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그머니 왼쪽 무릎을 차지하고 앉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의 여동생과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압력(?)에 굴복할 리한이 아니었다.
“진짜 자매라서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거냐? 후후후후. 그런 사정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다.보다시피 나는 자매를 동시에 안을 수 있는 두 개의 팔과 무릎이 있어! 그러니까 둘 다 싸우지 말고 내 것이 되어라. 아, 물론. 코제트는 앞으로 7년 기다리도록.”
“당당하게 쓰레기 같은 소리를…”
“아잉~♡자상하기 이를 데가 없는 예전의 마이허니도 좋아지만 이렇게 폭군 같은 마이 허니도 엄청나게 취향이에요. 나쁜 남자의 매력에 오싹오싹♡ 다시 한번 반해버릴 것 같아. 오싹오싹해요♡”
“뭣?!!”
“후후후후. 적어도 작은 버전의 이리나는 솔직하구나.”
“작은 버전의 이리나가 아니에요!!”
자매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두 사람을 다독인(?)후에 일행과 합류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리나들은 자신들하고 신분이 다른 자작 가문의 영애들이 참전해버리자 다소 당황하는 듯했지만, 금방 친해져서 격식을 내려놓고 허물없게 지내는 모습이 리한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이 되었다.
산장 휴게소로 모여서 좌부동 자매가 준비해 준 식사를 맛있게 먹은 일행은 식후의 티타임을 가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리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제 놀 만큼 놀았으니까 돌아가자, 코제트.”
“싫은데요?”
나디아의 무릎에 앉혀져서 여성들에게머리를 쓰다듬어지고 있던 소녀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이제 귀가할 시간이야.”
“그렇게 말해놓고 마이 허니를 혼자서 독차지하려는 거죠? 절대로 안 돼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도련님하고 나눌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그것만 끝나면 나도 돌아갈 거야.”
“흥! 그렇게 저를 어린애 취급하다니 기가 막히는군요. 저는 이미 어엿한 레이디라고요? 김나지움의 성적도 언니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해요. 언니가 일부러 자신의 성적을 떨어트리기 전보다 훨씬 더! 입학하고 나서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졸업 자격도 이미 충분하다고요!!”
“…그래서.지금의 나에게 이길 수 있다고?”
휘오오오오-
이리나가 살며시 자신의 기도를 끌어올리자 코제트가 움찔했다.
“네가 아무리 조숙하게 굴어도 결국에는 12살일 뿐이야. 나이에는 나이에 맞는대화가 있어. 그러니까 얌전하게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해.”
“싫어요!!”
“코제트!!”
“도와주세요, 마이 허니! 허니는 내 편이죠???”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리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이리나가 옳아. 그녀가 하는 말을 따르도록 해라.”
“그, 그럴 수가…너무해요. 마이 허니. 믿고 있었는데…꺅?”
코제트와숨이 닿을 정도로가까운 거리까지 단숨에 다가간 그가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나에게 이상한 믿음을 가지지 마라. 네 어리광 때문에 나를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소리다. 내 여자가 되고 싶으면 거기에 걸맞게 행동해라. 그러면 7년 후에 기쁘게 신부로 맞이해 주지.”
“넷!! 고집부려서 죄송합니다아!!”
눈동자가 하트로 변하며 그렇게 외쳤다.
“후후후후.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귀여운 녀석.”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해롱해롱해져서경호원들과 함께 스키장을 떠났다.
[새로운 버전의 마이 허니는 대단히 위험한 거시와요~ 엄청난 파괴력에 저도 모르게 흐물흐물 녹아버린 거시와요~ 아아아앙~~~♡]
“…”
이 상황에잠시 침묵에 빠진 장내.
“다음부터는 조금 더 부드럽게 타이르도록 해라. 가능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해야지.”
“조금 지나치게 맞추시는 것이 아닌가요?!”
여성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가 뭐지?”
“…”
대답하지 않고 냉랭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이리나.
리한은 한숨을 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또 시작이군. 고집은 그만 부리고 여기로 와서 앉아라. 하여간에 평소에는 고분고분한 녀석이 왜 자신의 여동생만 관련이 되면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지 모르겠군.”
“따, 딱히 코제트 때문은 아닙니다만…”
“됐으니까 앉아!”
“네!!”
솔직하지 못한 그녀를 강압적으로 무릎에 앉히고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진한 키스를 해주자 헛기침을 하면서 중요한 용건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T-7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네, 오늘 아침에저희 가문에 성명이 도착했으니 왕국 전체. 아니, 대륙 전체에 같은 메시지를 보냈을것으로 추측됩니다.”
“내용이 뭐였지?”
“테르할 제국의 은요호 기관이 혈마법사와 결탁해서 오팔 왕국을 전복시키려고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더해서 그들이 공공연하게 외국 내정에 불법으로 간섭하며 반체제 인사들을 암살, 회유, 협박하며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드디어 시작된 외교 전쟁.
“단순하게 비난만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