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돌발 H이벤트)winter is cumming(5)
[공을 저렇게 배치하고 치는 방향에 타점, 힘 조절까지 옆에서 코치해주는데 못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리한이 당구대 위에 공을 놓은 장소는 버터플라이 로테이션이라고 해서,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시키기만 하면 여섯 구가 자동으로 펼쳐져서 모든 포켓에 들어가도록 세팅이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재능도 실력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판 초짜는 자신이 슈퍼 샷을 성공시켰다는 착각에 빠져서 굉장히 들뜰 수밖에 없었다.
“너무추켜세우지 말아 주십시오. 단순하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운만으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니까? 이건 틀림없는 재능이야. 이런 재간둥이 같으니라고…”
“그, 그렇습니까? 크흠. 확실히 뭔가 손맛 같은 게 있기는 했습니다만…”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육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일단 참견하지 말고 가만히 보고있어야 되겠지?]
[당연한 소리.]
“히끅?!”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는 리한이었다.
[어, 어떻게 우리 대화에…]
[후후후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뒷담화를 하고 있었다니 잔망스러운 녀석들이군.]
[꿀꺽.]
자신들끼리 은밀하게 주고받는 텔레파시 채널에 아무렇지도 않게 개입해 들어오자 좌부동 자매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얌전하게 시중이나 들어라.함부로 나불거렸다가는…뭐, 어떤 벌을 받을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지.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었겠지?]
[써, 예써!]
[후후후. 착한 녀석들이군. 일이 잘되면 나중에 따로 포상을 내려주마♡]
오싹-
부르르르르
리한이 슬그머니 윙크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지도를 계속해 나갈 뿐이었다.
‘좋은 엉덩이로군.’
스토로크 연습을 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지젤은 완벽한 후배위 자세로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매력적인 뒷모습을 무방비하게 노출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성희롱을 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생각에 애써 성을 내는 아랫도리를 달래며 다시 한번 칭찬 세례를 이어나갔다.
“폼이 아주 좋군. 이 정도면 슬슬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도 되겠어.”
“그렇습니까? 헤헤.”
쑥스러워하면서도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반응.
사실은 아직 트집 잡을 구석이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똑바로 쳐서 공을 굴러가게 할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본게임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혹시 예전에 따로 쳐본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당구 같은 부르주아 스포츠를 제가 감히 어디에서 해봤겠습니까?”
“그래?”
물론, 그녀가 옐로우 존 태생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치는 맛이 있군요. 상류층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제 게임 하나를 가르쳐주지.”
“잘 부탁드립니다.”
지젤이 흥미를 드러내자 곧바로 포켓볼에서도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나인볼의 플레이 방법과 규칙을 알려줬다.
“그러니까 이 하얀색 큐볼(수구)로 번호가 낮은 공부터 차례대로 구멍, 포켓에 집어넣으면 된다는 말씀이로군요.”
“맞아.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9번 공을 포켓에 집어넣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야.”
“의외로 간단하군요. 이 정도면 저도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후후후.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어디 한 번 1대 1로 대결해 볼까?”
“네? 버, 벌써 말입니까??”
“하하하하! 나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게다가 이 게임은 과정에 상관없이 마지막에 9번 공을 포켓에 집어넣기만 하면 승리하는 거야.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누가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지. 게다가 인생 첫 번째 샷으로 6구를 한 번에 집어넣은 너라면 솔직히 내가 질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습니까?”
상당히 솔깃한 눈치.
물론, 거짓말이었다.
지젤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당구라는 도락은 아직 부르주아 이상의 상류층만 즐기고 있는 도락이었다.
이 놀이가 발명된 것 자체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데다가, 당구대 자체가 상당한 고가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이나 즐기던 여흥이 입소문을 타고 내려오면서 부자들도 즐기기 시작한 시점.
후계자는 당연히 이 놀이를 어린 시절부터 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잘했다.
태중양생술 덕분에 조금만 노력해도 일반인보다 금방 숙달이 되는데 한동안 푹 빠져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프로라고 될만한 수준, 거기에 퍼스트 선과 결합하면서 뛰어난 계산능력과 기계 같은 정밀함까지 더해지면서 이제는 감히 게임 자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마디로 그가 진심으로 나오면 지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길 수가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번 게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접대.
그녀를 당구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서 몰입시켜야 의미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패배해도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한 수 배우겠습니다, 후계자님.”
‘후후후후. 걸려들었군.’
공손하게 부탁하는 그녀였지만 리한의 눈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늑대의 함정에 걸어들어오는 순진한 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란란이 9개의 공을 다이아몬드 형태로 레크(배열)했다.
“일단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먼저 브레이크 샷을 하지.”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자세를 취해서 샷을 날렸다.
딱! 딱!
데구르르르르-
수구와 충돌하면서 도미노처럼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공들.
일견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계산된 위치로 정확하게 안착을 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게임.
‘아무리 접대 당구라고는 하지만 무조건 져주면 안 돼. 오히려 너무 대놓고 봐줬다가는 금방 눈치를 채고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고 생각하겠지.’
핵심은 그녀를 얼마나 게임에 빠져들게 하느냐는 것이다.
리한은 이 모든 것을 계산하면서 게임을 만들어나가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레이크샷을 날린 그는 능청스럽게 기지개를 켜면서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배치가 어렵게 되어버렸군.”
“현재 위치에서 수구로 1번 공을 포켓에 집어넣으셔야 하는 겁니까?”
“그래.”
“확실히 어려워 보이는군요.”
리한이 노려야 하는 1번 공은 포켓 바로 앞에 있었다.
하지만 2번 공과 5번 공이 절묘하게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
사실 별로 어려운 장애물은 아니었지만, 초보자의 시선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그는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리저리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쿠션을 노려서 신중하게 샷을 날렸다.
딱!
떼구르르르르!
결과는 실패.
“파울입니다.”
심판을 보는 린린이 손을 들면서 그렇게 외쳤다.
“살짝 빗나갔군요.”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너무좋은 위치에 기회를 넘겨줘 버렸는데?”
리한의 말대로 그가 날린 수구는 쿠션을 맞고 튕겨 나와서 1번 공을 노리기에 너무 좋은 위치로 굴러가 버리고 말았다.
딱!
떼구르르르르르!
아무리 초보라고 해도 이런 찬스를 놓칠 리가 없었다.
센터샷밖에 배우지 못한 지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
이어서 자세를 180도 돌려서 때릴 수 있는 2번 공도 직선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연이어 성공을 거뒀다.
덜컹!
“나이스 샷!”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어렵겠는데?”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요.”
3번 공은 가로축으로 먼 거리에 있는 데다가 한 번은 쿠션에 맞춰서 튕기지 않으면 포켓으로 집어넣는 것을 노릴 수가 없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초보자가 보기에만 어려울 뿐이지 실제로는 간단한 응용문제에 불과한 배치.
아무런 기교 없이 정직한 센터샷으로 각도를 조절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란란과 린린이 보기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설계된 튜토리얼로 보일 뿐이었다.
“으음, 어떻게 쳐야 할지…”
“후후후후. 시간은 넉넉하니까 충분히 고민해 보라고.”
지젤이 고민에 빠지자 리한은 손가락을 튕겨서 좌부동 자매에게 마티니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녀가 노려야 하는 쿠션의 뒤로 슬그머니 내려놓아서 올리브가 과녁처럼 보이게 세팅해 줬다.
이름하여 서브리미널 효과.
“!!!”
딱!
떼구르르르르!!
단숨에 힌트를 알아차리고 샷을 성공시키는 지젤.
[박수!]
“와우! 미라클 샷!!”
“굉장해요. 지젤 님.”
짝짝짝짝짝!
사념파로 지시를 내리자 화들짝 놀란 좌부동 자매가 응원단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정말 대단하군. 설마 처음부터 공 세 개를 연속으로 포켓으로 집어넣다니 말이야.”
“아닙니다. 후계자님. 이번에도 역시 운이 좋았을 뿐인데요…”
“아니야, 아니야.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 게다가 처음 하는 게임에서 이렇게 솜씨를 발휘하다니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역시 자네는 재능이 있어.”
“그, 그렇습니까? 사실 저도 마지막 공은 조금 어렵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크흠. 어쩌면 당구라는게임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하고 잘 맞는지도 모르겠군요. 후후.”
슬슬 우쭐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반은 넘어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