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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화 〉선전포고(5) (200/429)



〈 200화 〉선전포고(5)

그렇게 쓰레기 같은 고민을 하는 사이에 일행은 별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당히 넓군.”

사용하지 않는 장소라고 들었지만 규모만 보면 아토스가 벡워스에서 임대를 했던 저택보다 크고 넓었다.


“간단하게 내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이번에도 역시 랜달이 가이드를 맡았다.


전형적인 북방 스타일에 중후함이 느껴지는 석조 구조물.


아스트라세 가문은 세경가 중에서도 가장 검소하다는평판을 듣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장소마다 명화와 아름다운 조각상이 즐비해 있는 것을 보면서 리한은 살짝 실소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도자기 하나만 가져다 팔아도 내 목에 걸려있었던 현상금 값어치는 충분히 하겠군.’

마르텔 대모는 1만 대륙 은화, 돌로레스는 2만 대륙 은화.

그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 정도로 작은 푼돈이지만, 여기에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는 이유는 이것이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를 감안해서 현실적으로 책정한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수배서는 서민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기준으로는 틀림없이 일확천금을 꿈꿀  있는 충분한 액수


애초에 아슈킬 가문이 총력을 동원했는데도 찾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리한이 살아있을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때문에, 장례식이라도 치러주려고 자신들이 미처 살피지 못한 장소를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서 탐색하려고 했을 뿐이다.

이렇게 인정에 호소하는 명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아슈킬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후계자의 시체가 발견되더라도 지역 귀족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온전히 넘겨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이것은 어디까지나 후계자가 죽어있다는 전제로 가능한 계산.


하지만 살아있다는 전제를 해도 이 현상금 액수를 너무 크게 책정해버리는 것은 역시나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왜냐면 금액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이에나처럼 관심을 가지고 몰려드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의 오팔 왕국에서 리한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이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뱃놀이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인간 태풍, 걸어 다니는 트러블 메이커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족의 손에, 그것도 아슈킬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에서 살아있는 후계자가 발견되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이라는 것이다.

순순히 넘겨주면 고맙겠지만 공화국파에 넘겨주면 부르는 게 값.

아니면 리한이 그랬던 것처럼 제국파와 공화국파를 상대로 경쟁 입찰을 유도할 수도 있는 등, 정치적인 활용방법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그래서 죽었다는 가정을 하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서민들이나혹할 액수를 제시해야만, 한스 같은 촌무지렁이들이 자신들의 조그마한 인생역전을 꿈꾸며 제니아까지 은밀하게 데려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물론, 한스 일가가 백치 상태인 리한을 국경 관문으로 데리고 왔다면 돌로레스에게 매수당한 국경 책임자들이 증거인멸을 위해서 모조리 참살해버렸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마커스인가 뭔가 하는 바운티 헌터에게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겨우 십수일 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굉장히 오래전으로 느껴지는 일을 회상하면서 리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차가운 외형하고는 다르게 실내 공간은 굉장히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대리석 바닥은 빨간 융단으로 덮여 있고 거실에는커다란 벽난로와 소파, 박제해서 걸어놓은 짐승의 머리 장식 같은 것들이 보였다.

따듯한 털가죽 카펫, 두꺼운 솜이불, 증기를 뿜어내는 주전자, 그리고 침실마다 설치되어 있는 간단하게 불을 지펴서 온도를 조절하거나 빵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오븐 겸 난로까지.

저택 뒤편으로는 방풍 벽과 가림막이 되어주는 커다란 바위에 노천 온천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넓은 운동장처럼 펼쳐진 새하얀 눈밭과 수선화들이 만개해서 흔들리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뛰어오라는 것처럼 유혹하고 있었다.

5월의 광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겨울의 계절감.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별궁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물건은 중앙 홀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커다란 조각상이었다.


“이건…”


“네. 전부 얼음입니다.”

폭포수, 어쩌면 눈사태처럼 보이기도 하는 광경이 지금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려올 것 같은 역동적인 형상으로 자신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특이한적은 이 모든 것이 공중에  있다는 것.

사방으로 흩날리는 조그마한 알갱이들, 물방울까지 아무런 마법이나 장치도 없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톡!


호기심에 살짝 건드려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이런 상황이 일어난 순간에 공간을 분리해서 시간을 정지시켜놓은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저희 집안에서 최초로 S급에 도달한 고조부께서 만들어내신 작품입니다. 무아지경 속에서 심득을 얻은 순간에 검을 휘둘렀더니 이렇게 되어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번이나 재현하려고 했지만  번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설영빙천공의 극의가 담겨 있다는 소리군.”

리한의 말에 랜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하니까 이것을 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가문에서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경지라는 것은 틀림이 없으니까요. 고조부께서도 설영빙천공을 대성하기 위한 길잡이로 삼으라면서 물려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가문에서는 파산벽破山碧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렇군. 평범한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내력이 있을 줄이야. 달의 눈물도 그렇지만 아스트라세 가문도 사연이 많군.”

“하하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천년 가문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혹시 여기만 아니라 크레센트 문도 돌아보고 싶다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정체를 숨기시기는 해야겠지만 최대한 믿을 수 있는 경호원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마음이 내키면 그렇게 하지.”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을 했다.


“별궁 안내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도련님을 모시기에는 조금 누추하지만 최대한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하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죠. 장래에 자형이나 매형이 될지도 모르는데요.”

“자형이야!”

“매형이에요. 오라버니!!”

파지지지지직!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 자매들이 눈싸움을 펼치며 그렇게 외쳤다.


[크흠, 어느 쪽이든 잘 부탁드립니다. 제발 데려가 주세요…]


“후후후후. 그 점은 염려하지 마라.”

간절함이 느껴지는 랜달의 귓속말에 그렇게 대답하면 리한은 양손의 꽃을 끌어안았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 네, 네!”


“어맛? 마이 피앙세가 이런 박력을…이글거리는 눈동자에 코제트는 두근두근♡”

어린 소녀의 표현력이 다소 잔망스럽기는 했지만 양쪽 다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물론, 어린 쪽은 아직 7년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크흠, 크흠! 그러면 도련님. 저희는 이쯤에서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노골적인 상황이 불편해졌는지 가만히 있던 루돌프가 두 사람을 떼어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입속에 밀어 넣고는 휘파람을 세차게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펑!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허공에서 짠하고 합창하면서 나타나는  명의 소녀.

바가지 형태의 머리 모양에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색깔만 달랐고, 이국적인 동양의 느낌이 물씬 피어오르는 단정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설마 좌부동이냐?”

“그렇습니다, 도련님. 먼 동쪽 나라에 집을 지키며 복을 불러온다고 알려진 요정들입니다. 평소에도 별궁의 관리는 녀석들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어떤 허드렛일이라도 사양하지 말고 시켜주십시오.”


“란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손님!”

“린린이에요. 무슨 일이든지…명령만 내려주세요.”

씩씩하게 손을 들면서 말하는 하얀 소녀가 란란이었고 살짝 부끄러워하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는 검은 소녀가 린린이었다.

“흐음. 무슨 명령이라도 들어준다니 그것참 여러모로 기대되는군. 후후후후후.”


“?!!!”

부르르르르-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뱀처럼 두 사람을 훑어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자 오한을 느낀 좌부동 자매가 몸서리를 쳤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자리에는 리한의 사악(?)한 속내를 알아차리고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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