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H이벤트)개와 늑대와 사간(3)
왕국군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빼면 루크는 거의 빈털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작의 지위와 함께 영지를 하사받았지만 규모가 너무 작아서 장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그마저도 가주의 자리와 함께 일찌감치 후손들에게 물려줘 버리는 바람에, 개인재산이라고는 왕실에서 품위 유지를 위해서 임대해주고 있는 저택과 녹봉을 약간 저축해놓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가 세운 공적과 나라에 대한 헌신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푸대접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델링거 왕실에서도 이런 문제를 알고 몇 번이나 처우를 개선해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명문 귀족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반대해버리는 바람에 번번이 무산되어 버렸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천한 출신이 분에 넘치는 은상을 누리면 주제를 모르고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 영감탱이가 미련 곰탱이처럼 수용해버린 것도 한몫했지.’
재물을 탐내는 것은 하찮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무릇, 진정한 군인이라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헌신해야지 사리사욕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법.
얼핏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지만 리한이 보기에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나라도 마누라도 팔아먹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가 조금 더 넓게 생각했다면 자신이 아니라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공적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제 2, 제3의 루크를 꿈꾸는 사람이 씨가 말라버렸던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죽을 둥 살 둥노력해봤자 집 지키는 개 취급을 받아버리면 누가 의욕을 가지겠는가.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지나치게 고결하면 발자취를 따라가기가 어려워지는 법이었다.
더 환장할 노릇은 기득권이 이런 모습에 의기양양해져서 청년 무장들에게 본받으라고 훈계하고 있다는 것.
애국심과 충성심이 아무리 숭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박봉에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굶주려서 꺼이꺼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법 없이 살던 사람도 도둑놈 매국노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런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이 “요즘 젊은 녀석들은…”이라고 투덜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하지만 리한은 굳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한소리 한다고 해서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왕국군의 사정 따위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후계자의 과거사였기 때문에 늙은이의 넋두리를 무시해버리고 대화 주제를 원점으로 회귀시켰다.
“유레시아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면 흔히 일컬어지는 팔성천八星天을 가리키시는 겁니까?”
“후후후후. 일반적으로는 그들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져 있지. S급을 뛰어넘은 카테고리 아웃(측정 불가)인 데다가, 한명 한명이 나라 하나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자들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까 따로 생각하는 후보가 있는 모양이군요. 예를 들면 처음에 언급한…쥬란 신이라던가.”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흉터가 욱신거렸지만 참아내면서 말을 꺼냈다.
“세계 최강의 검사라는 명성이 자자하죠. 실제로는 과장된 소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아니. 호사가들이 떠들어대는 말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해. 녀석은 틀림없이 팔성천과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벌써 뛰어넘었을지도 모르지.”
“?!!”
충격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에 리한은 물론이고 이리나까지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설마, 농담이시겠죠? 아무리 그래도 아직 30대도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무재武才중에서 무재라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가…”
“혹시 예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었다.”
“10년 전이라면…”
왼쪽 눈의 흉터가 다시 한번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딱 너희들의 나이 또래였지. 제국의 젊은 무장 하나가 기사 수행을 하겠다면서 찾아왔다. 소위 말하는 도장 깨기라는 것이었지.”
“도장 깨기라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하하하하하. 그래. 건방진 녀석이었지. 하지만 실력은 진짜배기였다. 왕국 유수의 무장들이 모조리 한두 회합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버렸으니까 말이야.”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창피하니까 공식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거지. 쉬쉬하면서 숨기려고 하기도 했고 말이야. 게다가 녀석은 자기보다 약한 녀석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자존심을 있는 대로 짓밟아버렸지. 나중에 왕도 로즈풀에 갈 일이 있다면 유명한 무장들에게 쥬란 신에 대해서 물어보도록 해라. 아마,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들이 많을 거다.”
루크는 생각만으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그렇게 수치스러운 패배의 행렬이 이어지다 보니 나에게까지 차례가 오더구나. 왕국의 자존심을 세워달라고 말이야. 정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지.”
“설마 받아들이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 상태가 그때라고 해서 좋지는 않았을뿐더러, 만에 하나 패배하기라도 했다가는 보통 문제가 아니야. 아무리 공식 기록이 남지 않더라도 소문까지 막을 수가 있었겠느냐?”
“그랬을 테죠.”
아직 20대도 되지 않은 제국의 무장에게 왕국 최고의 대장군과 싸우는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져버리기라도 했다가는 나라 전체의 위신이 추락해버리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기어이 나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늦은 밤, 침실에 들어섰을 때.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있더군. 이미 그럴 가능성을 염려해서 저택의 경비를 철통같이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마치 어제 찾아온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더군.”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루크의 말에 리한은 시치미를 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싸우신 겁니까?”
“아니.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다. 왜냐면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싸울 시기를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던 게지. 녀석의 성을 채워줬으려면 100년은 일찍 찾아왔어야 했을 거다. 아니면 회춘한 지금 오던가. 물론, 어느 쪽이라도 패배하는 것은 나였을 테지만.”
“…농담이시겠죠?”
이리나가 억지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물어봤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이라면 그것은 마치…”
“그래. 유성왕의 재림이라는 표현이 과언이 아니라는 게지.”
“하지만 그건 신화에 등장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유성왕은 테르할 제국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건국의 시조로서 정말로 실존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라 전체가 무武에 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국의 최고 존엄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설화가 바로 수도 메테오폴의 탄생에 얽힌 내용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 하나가 대륙의 최고봉이었던 라이코스산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렸다. 그리고 반경 400km²의 땅을 완전한 평지로 만들어버렸는데, 이곳을 신성한 땅. 다이모니온 코라라고 칭하고 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완전한 헛소리에요. 세상에 누구도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신이 아닌 이상은…”
“뭐, 진실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르지. 어쨌든 그 땅이 특별한 것은 사실이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테르할 제국의 수도 메테오폴은 황궁 스토이케이온을 중심으로 반경 400km²가 자로 재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직선으로 조금씩 낮아지는 경사를 이루고 있다.
중심이 제일 높은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라이코스를 황제의 발아래 온 세상을 내려다보겠다는 것.
그래서 다이모니온 코라에는 황궁보다 높은 건물을 세우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유성왕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제국의 역대 황제 중에 하나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통해서 조작한 것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모든 방향으로 균일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에 가까운 솜씨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유성왕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자연재해가 아닌 사람의 무공, 번천복지飜天覆地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쨌든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시작이니까 말이야.”
“드디어 흉터에 얽힌 내용으로 넘어가는군요.”
“크흠. 솔직하게 말해서 그 상처가 생긴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안하구나. 나도 그때는 젊었으니까 말이지…”
“…”
당시 루크의 나이는 148세.
재미없는 농담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싸늘해져 버리고말았다.
“됐으니까 이야기나 계속하십시오.”
“녀석도 참. 어쨌든 자존심이 상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왕국의 저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 건방진 녀석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가르쳐주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제니아를 찾아가게 되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말이야.”
“그건 설마…”
“그래. 평온의 검사 애쉬님이지. 세간에서는 왕국의 삼투장 중에서 마지막으로 칭하고 있지만…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지. 그분의 저력은 그따위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왜냐면 그분이야말로 팔성천八星天을 뛰어넘은 세계 최강의 무장이시니까 말이다.”
쿠구구구구궁!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