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H이벤트)개와 늑대와 사간(2)
루크는 리쉬케에게 연무장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쿠구구구구구궁-
“후계자가 3년 동안 실종되었다고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리한을 자신의 무릎에 눕혀놓은 이리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대체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어봐도 좀처럼 대답해 주지 않는 내용이라서…”
“보아하니 평범한 시기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
루크는 복잡한 심경으로 리한을 내려다보았다.
틀림없이 재목은 재목이었다.
월환쌍극의 초식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구사했으며 탈진해서 쓰러지는 순간까지 낭비되는 움직임이 없이 검의 예기禮器를 유지해 냈다.
기본에 충실했지만 임기응변은 더 탁월해서 재빠른 판단력과 순발력에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금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점밖에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가슴 속에 엄청난 한을 품고 있구나. 도대체 지난 3년 동안에 무슨 지옥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커다란 분노가 꿈틀거린단 말인가? 쯧쯧쯧쯧. 자신의 여자하고는 완전히 정반대라니.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거늘…’
무도武道의 마음가짐 중에서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갑게 하라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지나치는 것은 오히려 모자라는 것만 못했다.
리한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는 감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냉철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그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면 서툴러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버리고 휘두르는 검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기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뤄야 하거늘…쯧쯧쯧쯧. 세상이 참으로 야박하구나. 천재에게 이런 시련을 부여하다니 말이야.’
리한은 현재 A급 무장이 되느냐 마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A급과 B급무장을 가르는 차이는 중단전을 개방하느냐 못하느냐는 것.
그리고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심기체가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물아일체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야만 했다.
하지만 리한은 가장 중요한 심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이분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본인조차 알고 있는 문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폭발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가슴속에 품고 있는 원한과 증오가 너무거대해서, 조금이라도 억누르는 것을 느슨하게 했다가는 폭주해서 주화입마에 빠져버릴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어디에서 해소라도 하면 될 텐데 말이야. 저렇게 커다란 분노라면 끝장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테지. 휴우, 돌로레스와 래리가 정말로 몹쓸 짓을 했구나. 심마에 빠져서 마두가 되어버리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대련을 통해서 리한이 품고 있는 커다란 원한과 증오의 편린을 엿본 루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했지만, 대부분 정답을 맞힌 그도 이 부분만큼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의 분노는 인간 전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문제만큼은 누군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있는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리한 스스로가 마주하고 극복해야 하는 개인의 과제.
더 이상 대련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루크는 부하에게 건네받은 타올로 땀을 닦으면서 입을 열었다.
“녀석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후계자와 나는 10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제니아에서 말입니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하하하하하하. 모르는 게 당연할 거야.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게 몰래 찾아갈 일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이 사실을 알고 있는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마르텔 대모님과 여기에 있는 후계자 녀석을 포함해서 말이야.”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리한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투덜거렸다.
“…왜 멋대로 회상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제가 들어야 의미가 있는 내용일 텐데요.”
“그렇지 않아도 성녀님에게 부탁해서 깨워주려고 했던 참이다. 벌써 의식이 들어오다니 대단한 회복능력이구나.”
“쓸데없는 잡담은 됐으니까 이야기나 계속하시죠.”
“후후후후. 성급한 녀석이로군. 하지만 들려주고 말고는 승자인 내가 결정할 사항이니까 재촉하지 말거라. 아해야.”
“…제기랄.”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리나의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면서 화풀이를 했다.
“스으으읍, 하아아아. 스으으읍, 하아아아.”
“도, 도련님! 이런 곳에서…하읏?!”
“크흠, 크흠! 거 참, 녀석도. 뭐 좋다. 옛말에 호색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혈기왕성한 것은 눈감아주지.”
낯뜨거운 모습에 괜스레 무안해진 루크가 헛기침을 하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유레시아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여윽시 백전무패의 명장. 위대하신 킹갓제너럴 루크 장군님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래. 이 몸이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아니, 아니. 쓸데없이 아첨하라는 것이 아니잖느냐! 솔직하게 말해서 내 실력은 대륙 전체에서도 50위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재야에 숨어있는 은거 기인까지 합치면 100위권에 들어갈지도 미지수지.”
“…생각보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시는군요.”
“과소평가가 아니라 객관적인 판단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요즘 젊은것들은 도무지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가 입만 열면 이렇게 청년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나이 먹은 사람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오팔 왕국 무장들의 수준이 100년 전보다 퇴보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국의 수준이 떨어졌다고해도 이것이 모든 나라의 전체적인 경향이었다면 상관이 없었을 테지만 상황은 오히려 정 반대.
선진 국가에서는 경쟁적으로 강한 무장과 마법사를 육성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고, 최근에는 민족주의라던가, 노블리스 오블리제, 군국주의 집단 교련과 엘리트 무장주의 같은 다양한 사상과 방법론이 제창되면서 세계 각국의 군사경쟁력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이런세계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팔 왕국 무장들의 수준이 떨어진 이유는 단순했다.
봉건 사회가 지나치게 길게 이어지면서 귀족들이 타락하고 나태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귀족들이 C급 무장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태중양생술과 엘리트 교육의 필수 코스인 김나지움을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이경지에 올라설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옛날로 치면 드래곤 슬레이어나, 용사, 영웅 정도의 힘을 손에 넣는 것.
평범한 일반 백성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달할 수가 없는 경지였기 때문에 이 조건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민중 봉기가 성공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귀족의 노력이 강제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자작 이상의 명가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이 노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마찬가지로 후계자가 태어난 순간부터는 모든 제약이 사라져서 수련을 계속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귀족 대부분이 이 단계에서 수련을 때려치워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금수저로 태어나서 돈과 지위, 명예, 권력, 등 무엇 하나 모자랄 것이 없는 자유로운 환경이 주어지는데, 굳이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을 동반하는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팔 왕국의 귀족들은 김나지움을 졸업하는 순간에 급격하게 한심해져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이렇게수많은 나태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수련에 매진해서 강해지려는 자들은 있었다.
하지만 오팔 왕국 귀족 사회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는 그것마저도 제약이 있었다.
왜냐면 모난 돌이 정을 맞아버리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맞는 실력을 가져라.
개풀 뜯어먹는 소리였지만 낮은 계급의 귀족 자제가 무공이나 마법 수련에 매진하고 있으면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는 충고(?)였다.
그리고 만약 이 충고를 무시하고 거슬릴 정도로 강해져 버리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습하기 이를 데가 없는 집단 괴롭힘의 표적이 되어서 포기하고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죽이려고 들었다.
[왜 천한 녀석이 주제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려고 하느냐?!]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현재 진행형으로 고통받고 있는 케이스가 바로 크레이그 가문.
그리고 루크 또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평생을 고통받고 살아온 케이스였다.
그는 남작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실력은 가장 뛰어났지만,후계자가 되지도 못했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왕국군에 말뚝을 박아버린 케이스였다.
참고로 그가 수련한 무공인 패왕사신무는 이름은 그럴싸해도 등급으로 나누면 중하급밖에되지 않는 품질의 무공서였다.
무투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현무, 주작, 백호, 청룡의 품세로 자세를 바꿔야만 하는 데다가, 기술 종류도 쓸데없이 많아서 수련 자체가 어렵고 각 품세의 장단점이 명확하므로 약점 자체가 지나치게 많았다.
하지만 루크는 이 모든 단점을 뼈를 깎는 노력과 수련으로 극복해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능력과 실적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냐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올시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