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라떼는 말이야(4)
[리스크를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어지간히도 후계자를 경계하시는 모양이군요.]
“그자는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엠프리스!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더 크기 전에 당장 싹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카밀라 요원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협상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낫다고생각합니다.”
[…의외로군요. 그렇게까지 두려운 상대였나요?]
엠프리스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되물어봤다.
“뛰어나도 지나치게 뛰어난 인재입니다. 포섭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테지만…자칫 잘못했다가는 우리가 거꾸로 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설마, 그 정도려야…]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부하들의 표정에서 농담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협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서 판단해야겠군요.]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카밀라는 그때 일을떠올리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2차 협상을 시작할 당시, 그녀는 리한과 자신들의 1대 1거래가 이루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래 내용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극비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후계자가 공화국의 중역들을 모조리 참관시킨 이유도 자신들이 막시밀리안처럼 돌발 행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록히드 플랜의 지원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거래 내용을 숨겨서 협상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루크 장군에 의해서 저에게 먼저 발언권이 쥐어졌을 때. 그때가 저에게 주어진 딱 한 번의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유일한 기회였다고요??]
엠프리스가 깜짝 놀라서 되물어봤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공격적으로 협상 가격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탐색전을 펼치고 있을 때, 후계자는 이미 게임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로군요. 게임을 끝낼 준비라니…]
“단서는 있었습니다.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죠.”
카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받은 백지 서류의 마지막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가장 싸게 판다고 했을 때 구매하셨어야지.]
[이건…?]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선배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대가로 50억 대륙 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100억의 투자를 허사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으면 감수해야 할 거라고 이야기했죠. 그러지 않으면 상향조정은 있어도 하향조정은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보고를 받아서 아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추가 지출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죠.]
처음에 50억 대륙 은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많이 아무리 많이 올려봤자 60억, 아무리 양심이 없는 날강도라도 70억 이상은 요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이라면 T-7에서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지나치게 커다란 금액에 숫자의개념이 모호해져서 그렇지, 1억 대륙 은화만 해도어지간한 남작 가문을 영지와 함께 세트로 구매해버릴 수 있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리한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날강도였다.
“조그마한 추가 지출. 바로 그게 커다란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후계자가 했던 말과 의미를 조금 더 신중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신중하게 되새겨 보다니…아무리 가격이 없는 상품이라도 50억에 파는 물건을 4배나 주고 구입하는 것은 지나치게 바가지를 썼다는 생각밖에 들지가 않는데요???]
“그게 사실 50억짜리 물건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보다 못한 스미스가중간에 끼어들었다.
[그건 또 무슨소리죠?]
“엠프리스님. 50 더하기 100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에게 카밀라가 뜬금없이 질문해 왔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저하고 장난하시자고 이러는 것은 아닐 테고…어라??]
엠프리스는 이 대목에서 스미스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위화감을깨닫고 말을 멈췄다.
쿵!!
[서, 설마. 지금 그런 계산이 나와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액수가 나와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깜짝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그녀.
“바로 그렇습니다. 50더하기 100. 후계자는 우리에게 공화국파의 존속을 인질로 잡고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방백들이, 자신들이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말입니다…”
부르르르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내용에 엠프리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도대체어떻게 하면 그렇게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저도 카밀라 요원이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후계자는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국파를 해체했다가 자신의 입맛대로 다시 조립해버렸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터무니없군요. 우리가 그들을 구슬리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하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한숨을푹 내쉬고 말았다.
“일단, 후계자가 공화국파를 어떻게 해체했는지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카밀라는 협상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짤막하게 요약해 줬다.
파벌이 해체된 계기는 북방 3가의 결속이 단단하다고 큰소리를 치던 지그문트에게 리한이 그의 오른팔이 배신자였다는 사실을 밝혀지면서 시작되었다.
덕분에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그는 이를 갈면서 물러섰지만, 후계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T-7을 포함해서 공화국파의 모든 중역에게 배신자 리스트를 나눠줘 버리고 말았다.
“이게 바로 공화국파가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타였습니다.”
[이게요???]
너무 단순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엠프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후계자는 공화국파에 배신자들의 전체 리스트를 공유하지 않고, 개개인에게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분류해서 나눠줬습니다. 휘하에 배신자가 누구인지 본인만 알 수 있도록 말이죠.”
[방백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싸우도록 불화의 씨앗을 심어줬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로 북방 3가가 공화국파를 이탈하게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의 체면이 구겨지지 않으려고 도망친 거죠.”
[체면이라고요???]
깜짝 놀라서 외치자 카밀라가 다시 한번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그문트 방백이 먼저 망신을 당했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왜냐면 방백들이 리스트를 받아든 순간에 깨달아버리고 말았거든요.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이 세상에 배신자로 까발려지게 되면 그만한 망신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파벌에 계속 남아있으려면 리스트 내용을 서로에게 공개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는 겁니다.”
“방백들이 갑자기베리우스 후작의 무능과 실책을 꼬투리 잡고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파벌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적당한 핑계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공화국파의 수장이 좋은 희생양이었거든요.”
“만약에 우리가 그 상황에서 끼어들었다면 이번에는 우리를 향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쏟아냈을 겁니다. 카밀라는 잘 참았습니다.”
황당한 내용에 엠프리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것처럼 머리를 부여잡았다.
[말도 안 돼. 겨우 자존심 하나 구기는 것이 싫다고 파벌을 탈퇴해버리다니. 그자들에게는 국가의 중대사가 장난인가요??]
“귀족들에게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요.”
[이런 빌어먹을 귀족 녀석들이…]
카밀라와 스미스가 T-7의 요원으로 들어온 후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녀의 욕설이었다.
오팔 왕국에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영광(?)의 주인공은 지그문트 로체스.
오팔 왕국의 북동부 벨루카 전체를 다스리는 이 대귀족이 하루는 외국에서 방문한 손님과 함께 말을 타고서 자신의 영지를 안내해주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만신창이 남자 하나가 막무가내로 눈앞에 엎드려서 사정사정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읍소는 다음과 같았다.
그의 이름 존.
자신을 로체스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소금 광산의 노동자라고 소개한 남자는 광산의 책임자가 저지르고 있는 엄청난 부정과 비리를 폭로해 왔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책임자는 벨더라는 하급 귀족으로 인근에서 날뛰는 도적 떼와 결탁해서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었다.
광부 노동자 숫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주변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납치해서 강제로 가둬놓고 노역을 시키는가 하면, 임금 착복에, 구타 및 가혹행위, 강도, 강간, 그리고 로체스 가문에 상납해야 하는 소금까지 손을 대면서 횡령을 하는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다.
존은 벨더의 만행이 지그문트에게도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있다면서 강력한 처벌과 함께 정의 구현을 요구했지만, 그의 비극은 옆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손님이 대화 내용을 함께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인 손님은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다음에 깔깔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팔 왕국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가 보군요? 비렁뱅이가 뛰쳐나와서 대귀족에게 직소를 다 해오니까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