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H이벤트)공성전(7)
상상도 하지 못한 정체(ㄴㅇㄱ)와 황당한 진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했지만 리한은 진정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사라의 여동생 질 크레이그는 어린 시절에 불행한 사고에 휘말려서 진조의 피를 수혈받은 흡혈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앵커리지 공화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해서 당당한 시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해가 짧은 북방의 도시, 노던브리아를 마피아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어디까지나 특별한 케이스.
대다수 국가에서는 다른 이종족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일 뿐이며 노예로 부려지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특히나 피를 빤다는 특유의 습성 때문에 인간의 천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서, 데피리스 교단에서는 아예 세상에서 박멸해버려야 하는 악의 축으로까지 규정해버리고 있었다.
크레이그 가문에서는 절대로 바깥에 알려져서는안 되는 스캔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호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다는 건가?’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기 때문에 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흡혈귀가 되어버린 그녀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크레이그 가문은 다양한 해결책 중에서 그녀의 정체를 숨기고 사라의 곁에서 오늘까지 키워오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하게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일단 외모부터 흡혈귀화의 영향으로 신비로운 은발에 루비 눈동자를 가진 미소녀가 되어버렸고, 태중양생술에 엘리트 가정교육까지 받은 데다가 진조의 힘까지 더해져서 20대 초반의 나이로 벌써 A+급 무장의 반열에 올라있다고 한다.
만약에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리나를 제치고 왕국 최강의 차세대 무장으로 등극하는 셈이다.
‘세상은 넓고 숨은 고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눈앞에 있을 줄이야.’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선상에 나와있던 자신이 접근하는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압당해버린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세간에서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져나가지 않은 것은, 크레이그 가문에서 돈과 권력의 힘을 이용해서 총력을 당해서 무마시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질 본인도 원래부터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이며 소심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오늘까지는.
새벽 4시.
자신의 객실에서 독서에 열중하느라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던 사라는 잠자리에 들려고 하다가, 침대에 리한이 묶여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여동생 질이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를 본인의 앞마당에서 납치해 데려왔는데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일단 맨정신으로 감당할 수가 없는 대형 사고였기 때문에 술부터 한잔 마시고 깨어나기 전에 빠르게 증거를 인멸하고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왜냐면 이것이 여동생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일은 동생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말씀이로군요?”
“죄송합니다. 공자님. 하지만 질의 딱한 처지를 부디 이해해주세요. 얘가 조금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기는 해도 얼마나 순하고 착한 아이인데요. 지금까지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인내하기만 했던 아이가 처음으로 언니를 곤란하게 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내버려 둘 수가 있겠어요?? 당연히 도와줄 수밖에 없죠!!”
눈동자를 빛내면서 대답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당한 시스콘 기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개인적이고 제멋대로인 자매의 사정에 무고하게휘둘리는 입장도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안 그래도 공자님에게는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죄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공자님.”
자매가 나란히 허리를 숙이면서 공손하게 사과를 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죠. 하지만 여동생과 저를 이어주려고 했다면 어째서 본인이 나서서 그런 짓을 하셨던 겁니까?”
“그거야 이 답답한 동생 년이 우물쭈물하는 게 속이 터져서 그랬죠! 세상에 납치해서 구속까지 해버린 주제에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나 뭐라나. 소름이 돋아서 정말. 일단, 칼을 뽑아 들었으면 아예 빼도 박도 못 하게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라니까. 쓸데없이 반항하면서 말을 듣지를 않으니…”
“어, 언니!!!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질이 당황해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아하니 전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깨어나기 전에 다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그런 내용이었다는 건가?’
다시 돌이켜서 생각해보니 사라가 자신을 덮쳤을 때 그녀가 엄청나게 질투를 했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동생을 자극하려고 저를 그렇게 괴롭히셨다는 소리로군요.”
“뭐. 솔직하게 말해서 재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동생이라서 취향이 비슷한 걸까요? 공자님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콩닥거리고 흥미진진하던 게…이게 바로 본능? 이랄까~~호호호호호!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
반성하지 않고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려고 하는 사라의 모습에 리한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있었다.
‘좋아. 두 사람 모두 임신 처벌섹스는 확정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 때문에 잠시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상황을 정리해보면 틀림없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일단 수갑에서 풀려나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커다란 수확이었고, 질의 흥미로운 진실을 듣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알아냈으니 공략하는 것도 시간문제.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쏘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그녀를 함락시키면 자연스럽게 사라까지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확인해 놔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각하.”
“무엇인가요? 공자님.”
“어째서 갑자기 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주실 마음이 드신 겁니까?”
“그거야 물론, 공자님께서 먼저 비밀을 털어놔 주셨기 때문이죠. 굳이 기정사실을 만들거나 약점을 잡지 않아도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라면 서로 배신할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사업의 파트너로서 이번 일도 좋게 넘어가 주시기를 바래요.”
한 마디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으면 자신의 여동생을 책임져달라는 소리였다.
손익계산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태세전환을 해버리는 그야말로 [상인]이라는 표현이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머리 회전 속도.
하지만 그녀는 리한의 본성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안심했습니다. 역시 당신을 이번 협상의 파트너로 선택한 제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제 동생을 부디 오래오래 소중하게 대해주시기를 바래요.”
“응??? 어,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내려지는 거야?”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듣고 나서도 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했지만 이미 암묵적인 합의는 끝난 상태였다.
남은 것은 이제 눈앞에 정좌하고 앉아있는 그녀를 공략하는 것 뿐이다.
“질 크레이그 양.”
“네?!!”
“귀찮은 질문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도대체 저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기 때문에 납치까지 해버리신 겁니까?”
“그, 그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리한은 그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잡아 돌려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아…”
“중요한 문제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으으으. 그, 그러니까 일단은 외모부터 취향이기는 했고요…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공자님의 향기가 너무 끌리고 좋아서. 저도 모르게 새벽에 일어나서 몰래 스토킹을 해버렸는데…”
‘페로몬 때문이었다는 건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는지 몰라서 두려워졌지만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들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는데…선상 위에서. 다, 달빛에 비치는 공자님의 새하얀 목덜미가 너무 세, 섹시하고 선정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덥썩…”
‘식욕 때문이었다는 건가??’
사라는 소파에 앉아서 웃겨 죽겠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리한은 무시하고 취조를 계속했다.
“그래서 제 피 맛은 어땠습니까?”
“정말로 최고였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듯한. 지금까지 먹어왔던 가족들이나 동물의 피는 도대체 뭐였냐는 생각이 드는.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해지는 지상에 강림한 기적. 천상의 하모니였습니다!! 공자님과 비교하면 다른 피는 모두 쓰레기, 진흙 덩어리 이하였어요. 아아아아! 생각만 해도 입가에서 침이 줄줄…핫?!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역시 식욕이었군.’
피에 관해서 물어보자 순식간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니 흡혈귀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쓰레기, 진흙 덩어리 이하로 격하 당해버린 사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말로 공자님의 피가 그렇게 맛있어?”
“앗, 어, 언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언니의 피가 맛없다는 뜻은 아니라 공자님이 워낙 특별해서…”
“흐음. 그렇다면 나도 한번 먹어보고 싶은데??”
“????”
‘이 년들이??’
자매가 나란히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의 목덜미를 노려보는 바람에 등줄기가 오싹해져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