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후랑추전랑(10)
“저기…”
두 사람의 대화에 좀처럼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를 보던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녀님.”
“서, 성녀님이라니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장군님!!”
화들짝 놀란 그녀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자 루크는 허허롭게 웃었다.
“하하하하. 겸손이 과하시군요. 성녀님. 죄송하지만 소장은 오늘이날까지. 신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성인과 명의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습니다만 누구도 젊음을 되찾아주지는 못했으니까요.”
“…”
이 말에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왜냐면 노인의 말이 의도치 않게 아픈 곳을 찔렀기 때문이다.
귀족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먼저 의지하는 사람은 사제들이다.
문제는 막강한 의료권력을 독점한 상태로 돈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지만, 사제들의 치유 마법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생명이 위태로운 중상의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해주는 5서클 마법. 그레이트 힐.
3초 안에 절명할 수 있는 맹독부터 화상, 동상, 마비 등등의 온갖 종류의 상태 이상을 씻은 듯이 낫게 해주는 7서클 마법. 퍼펙트 큐어 운즈.
그리고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8서클 부활 마법인 리저렉션까지.
이 단계까지 도달한 사제를 세간에서는 성인, 또는 성자라고 칭송하는데 빛 계열의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교단이라면 어디든지 애지중지하며떠받들어줬다.
하지만 치유 마법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병이라도 편리하게 치료해주는 대신에 대상의 생명력을 급격하게 소진하고 수명까지 깎아 먹는 등가 교환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리한은 이것을 세포 활동을 지나치게 촉진하는 대가라고 이야기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거론하는 마법이 리저렉션.
죽은 사람을 되살려낸다고 하면 정말로 대단한 기적처럼 들리지만, 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을 살펴보면 이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로 죽음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물음표가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법의 시전 대상이 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면 소용이 없는 것은 기본.
나이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적거나 병약해서도 안 된다.
오직 신체 건강하고 젊은 사람을죽은 직후에만 소생시킬 수 있는 부활 마법.
그리고 살아난 사람은 지독한 후유증에시달리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부작용이 바로 신체의 급격한 노화였다.
마치 수명을 대가로 소원을 이뤄주는 악마처럼 10년 정도를 폭삭 늙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대로 죽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살아나는 게 어디겠냐마는 전지전능한 신의 기적이라고 부르기에는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고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신이나 악마. 천사들처럼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만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필멸자의 숙명이 노화요 죽음이었고. 신이 정한 세상의 섭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상식을 어느 날 갑자기 클레어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말았다.
“후후후후. 맞는 말씀이에요. 성녀님. 저는 당신께서 조금 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끼셔도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능력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카트리나님도 알고…”
그녀의 말에 당황해서 대답하다가 루크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깨닫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버리고 말았다.
“소장의 눈치를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녀님. 편하게 말씀해주시지요.”
“장군님 말씀이 맞아요. 자꾸 그러시니가 제가 꼭 눈치라도 준 것 같잖아요? 후후후후후후후-”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혹시 이 블러드 엘프가 거슬리시는거라면 왼쪽 눈을 세 번 깜빡여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허리를 접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무시무시한(?)협박에 세차게 도리질하며 소리를 내지르다가 자신이 무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둥지둥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군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녀님께서 떠안고 있는 고민거리를 말씀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소장이 비록 골수까지 군인이기는 해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사소한 조언 정도는 해드릴 수가 있을 겁니다.”
“어머? 지금 제 앞에서 나이 자랑을 하시는 건가요? 후후후후. 하여간 인간의 오만함이란…”
“흥! 자신의 종족 기준으로는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지나치게 까불어대는군. 세상에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은 시간과 삶을 살아가는 인간밖에는 없다네. 그러니까 쓸데없이 끼어들지 마시게. 장수족.”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누나~♡라고 상냥하게 불러주시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
루크가 정말 진심으로 극혐한다는 표정으로 노려봤지만 이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클레어는 끝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하지만…역시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왜냐면 이 문제는 제 스스로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줄리아님의 힘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저를 치료해주신 것을 신경 쓰는 겁니까?”
“…”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지만 정답이라는 사실은 눈치챌 수가 있었다.
이 모습에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파에 좀 더 편하게 기대어 누웠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에 이 늙은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나 들려드리죠.”
“와아아아아- 정.말 기.대.되.네.요.”
카트리나가 영혼 없는 박수를 보내왔지만 무시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성녀님은 혹시 후랑추전랑이라는 말씀을 들어보셨습니까?”
“뒤에서 오는 물결이 앞의 물결을 밀어낸다는 소리인가요?”
“맞습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과 혼용합니다만 소장은 이 두 개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별개의 뜻이라니…”
클레어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리실지모르겠지만 소장은 아주오래전부터 뒤에서 오는 물결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저를 대신해서. 아니, 저보다 훨씬 더 나은 인재가 나타나서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생각했죠.”
“큰 뜻을 품고 있으시다면 이제는 스스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완전히 정정해지셨잖아요.”
“아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이 정말로 끝일세. 자네의 주인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나?마지막 청춘을 시작하라고 말이야. 늙은이를 설레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아아- 불쌍한 우리의주인님.”
카트리나가 비극이라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그녀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각설하고 처음에 저는 그런 사람이 제 후손에서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흔한 아버지처럼 눈이 삐어버렸던 것이죠. 어린 시절부터 군인으로 키웠고 나라에 충성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녀석이 집을 나가버리더군요. 어린 손주 하나를 남겨두고서. 벌써 100년도 전에 일이죠.”
“엄격한 교육을 버티지 못했나 보죠?”
“카트리나님! 휴우- 정말로 상심이 크셨겠네요. 장군님.”
“아닙니다. 딱히 비극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왜냐면 녀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녀석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를 좋아했죠. 가정을 버리고 금발 머리의 미소년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정기선에 몸을 실어서…”
“앗, 아아아…”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뒷이야기는요??? 어디에서 결제하면 되죠???”
냉소적이던 카트리나가 엄청난 관심을 보이면서 재촉했고 클레어도 두근두근한 표정으로 뒷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쨌든 손자에 이어서 증손자까지도 제 교육은 실패했습니다. 아니, 저 혼자만 실패한 것도 아니었죠. 귀족들은 자기 잇속을 챙기는데 바빴고 덕분에 인재는 점점 줄어들기만 했으니까요. 제 시대에는 저를 포함해서 7명의 무장이 칠투장으로 있었습니다만…이제는 세 명뿐입니다. 그마저 새로운 얼굴은 하나뿐이죠.”
“테오 젝플리스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이 말에 루크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녀석에게는 정말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이 늙은이 여생에 한 줄기 빛을 가져다주는 줄 알았더니.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날뛰고 있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파멸하는 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쯧쯧쯧.”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고서 마지막 결론에 도착했다.
“세상 이치가그런 겁니다. 성녀님. 흐르지 않고 고이는 물은 썩기 마련이고 굴러오는 돌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부딪쳐서 깨져버리는 겁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가치관이 뒤바뀐다고 해서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십시오. 뭔가에 밀려난다는 게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
루크의 말에 잠시 침묵에 빠져서 생각을 하던 클레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장군님. 나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뒷물에 밀려나게 되면 도대체 무엇이 보인다는 겁니까?”
이 말에 그는 허허롭게 웃으면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팔 왕국의 영토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천 년이 넘는 역사에 존재해 왔지만 아직 한 번도 바닷가에 닿아본 적이 없죠. 세상의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고 이 베르디 강 또한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게 틀림없을 텐데 말입니다.”
“바다…라고요?”
“그렇습니다. 제 여생에 소원이 있다면 누군가가 밀어주는 커다란 물결에 실려서 저 넓은 바다에 시원하게 이 한 몸을 던져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
“아니면 물가에 부딪혀서 깨져버릴 수도 있지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하하하하!!”
흥취를 깰 수 있는 카트리나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듣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데 이 늙은이에게 커다란 희망을 남겨주고 간 뒷물결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뭐, 대수로운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질문을 듣고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말을 받았다.
“부딪혀 깨져버리거나 아니면 오래 살아서 고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안락한 노후 생활을 즐기라고 하시더군요.”
“그것참. 시건방지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말씀을 해주시는군.”
“…”
클레어는 이런 말을 듣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개운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 못했지만, 카트리나와 루크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오랜 지기라도 되는 것처럼 날이 밝을 때까지 이런저런 담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부여한 힘으로 루크의 육체를 다시 한번 조정해서 완전한 전성기 시절의만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해줬다.
리한은 클레어와의 약속을 지켰다.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후에 줄리아 교단의 신성 마법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특별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해준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으로.
[오늘부터 너는 인간이 아니다. 클레어. 이제부터는 더 원의 엔지니어로서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