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6화 〉후랑추전랑(9) (136/429)



〈 136화 〉후랑추전랑(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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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신이라면 청춘을 인생의 가장 마지막에 두겠다.

누군가가 했던  말을 루크 자신도 간절하게 바라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귀족들의 평균 수명은  200세.

군인들의 평균 수명 56세.

그리고 귀족이면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자들의 평균 수명은 89세.

오래 살고 싶다면 빠르게 후임자를 찾아서 인수인계하고 전역하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우스운 사실은 이 말에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반박하는 예시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을 군인으로 살아왔다.

수없는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나라에 충성을 바쳤지만, 덕분에 군부에서도 대체할 사람이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버린 까닭에 전역이 불가능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죽을 장소만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소원이 있다면 2가지.


하나는 가문과 출신을 뛰어넘어서 진정으로 오팔 왕국을 사랑하는 후계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뒤를 이어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대로 노쇠해져서 최후의 순간을 병상에 묶여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친구는 유언으로 불가능한 소련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현재 나이 158세.

모두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너무 오래 살았다고 떠들어댔지만 이만큼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실 하나를 꼽아보라면, 그것은 바로 다음 한순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기적과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크 장군님. 하지만 자기 소개를 하기 전에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있군요.”

자신의 고손주가 그런 나이였을까?


일방적이기 이를 데 없는 연락 서신을 보낸 후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젊은 청년은, 이미 자신의 생각 따위는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다는  같은 건방진 눈초리로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질문 하나를 자신에게 건네어 왔다.

“만약에 지금부터 인생의 마지막 청춘이 시작된다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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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 뚜벅-

새벽 2시 30분.


루크는 나잇값을 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열심히 어르고 달랬다.

적막한 방.

수발을 드는 모든 하인을 쫓아내 버렸기 때문에 유난히어둡고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순간마저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기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오늘 하루.

감히 단언하건대 살아오면서 최고의 날을 꼽아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날을 선택할 것이었다.


바닥에 쏟아버린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이 무색하게도,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젊음과 활력을 되찾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평가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자신이 늙고 병들었다고 무시하면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코를 베어 가려고 했었던 괘씸한 베리우스를 혼내줄 수도 있었고, 총사령관이 신경 쓰지 못한다고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져 있던 왕국군의 기강도 단단히 바로잡아 주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통쾌한 일을 꼽아보라면 30년 동안 자신의 곁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던 주치의. 데피리스 교단의 고위 사제 놈을 드디어 쫓아내 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냐.


인성파탄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당해본 사람만 아는 고역이었다.


하루종일 곁에서따라다니면서 세 살배기 아이를 가르치듯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회개하고 죄를 뉘우쳐라. 간절하게 기도하면 데피리스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헌금이 부족하다. 데피리스님을 향한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를 재잘거리는 사람이 24시간 옆에서 따라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자신이 내공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진작 혈압이 올라서 암살당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강을 되찾은 자신이 하루종일 배에서 배로 갈아타면서 군대의 기강을 바로잡고 다니자 헐레벌떡 달려와서 무리하지 말라고 펄펄 뛰었지만, 메디컬 체크로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난 후에는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루크는 그에게 지금까지 수고한 대가로 5천 대륙 은화의 수표를 써서 그 자리에서 집어 던졌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말도록 하지.]

단언하건대 자신이 다른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즐거워했던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생에서 가장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미 죽어서 천국에 있거나.

어느 쪽이라도  순간이 조금이라도 오래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계속될 모양이었으니까.

“황송하게도 이 늙은이의 방에 다시 왕림해 주셨군. 이번에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말이야. 보아하니까 알람 마법도 소용이 없는 것 같은데. 젊은이들을 조금 더 괴롭혀 봐야겠어.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라고 말이야.”


루크가 팔짱을 끼고서 투덜거리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일렁거리면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그것참 곤란한 말씀이시네요. 자꾸 그렇게 까다롭게 구시면 다음부터는 줄리아님의 은총이 찾아오지 못하실지도 모른다고요?”


커다란 가슴을 팔짱을 끼고서 과시해 보이는 블러드 엘프가 자신을 놀리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뒤에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있는 성녀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떳떳하다면 밝은 대낮에 찾아오라는 소리일세. 줄리아님의 은총이 언제부터 이렇게 쥐새끼처럼 몰래 돌아다니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쯧쯧쯧.”

“저, 저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말하는 바람에 멘탈이 흔들린 클레어가 곤혹스러워했지만, 카트리나가 그런 그녀를 다독이면서 대변인처럼 앞으로 나섰다.


“세상에! 화장실에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가다르다더니. 정말로 너무하시네요.경전에 이르기를 오른손이하는 일이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구절이있어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종류의 선의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춰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요.”

“말은 청산유수로군.”

가볍게 핀잔하면서도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한 루크는 마법 랜턴의 스위치를 눌러서 방 전체를 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소파의 상석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세상이 정말로 요지경이로군.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두 사람은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와 함께 이 배를 떠나지 않았던가?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명이나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짜잔~ 사실 저희 세 사람은 모두 쌍둥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화내실 건가요?”

“굳이 안 될 것도 없지. 예전에 내가 전쟁터에서싸웠던 라칼 사막의 술탄 군주는 전부 일곱 쌍둥이였거든. 한 놈을 죽이니까 다른 형제가복수하겠다고 덤벼들었지. 결국에는 마지막 한 놈까지 때려죽이고 나서야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네.”


“너무해! 그 말씀은 이렇게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여차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시는 거잖아요??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이제는 살해 협박이라니. 짐승! 남자는 전부 똑같아. 흑흑흑흑.”


스멀스멀 살기를 피워올리면서 말했는데도 능청스럽기 이를 데가 없자 루크는 한숨을 토해내면서 습관적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주물러 댔다.

“알았네. 알았어. 하아- 자네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주도권을 잡았다고 해서 앵커리지 공화국과 T-5를 너무 얕잡아 보지는 말게. 아무리 이빨이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야. 함부로 수염을 붙잡고 흔들어 대면서 장난을 쳤다가는 큰코 다칠  있어.”


“어머? 공화국파의 중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자상한 조언이시네요.”


“흥. 내가 아무리 늙었다고 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는 어린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게. 내가 제국이 아니라 공화국을 선택한 이유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을 뿐이야. 제국은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라서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뼈까지 으적으적 삼켜져 버리지. 반면에 공화국은 자신들의 잇속만 적당히 채울 수 있게 해주면 나라를 통째로 빼앗아가지는 않거든.”

 말을 들은 카트리나의 눈동자가 반짝하면서 빛났다.

“그 말씀은 마치 우리 오팔 왕국이 열강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피식-

“물론이지.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속 보이게 떠보지는 말게. 자네들이 정말로 이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든지 손을 빌려줄 의향이 있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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