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후랑추전랑(8)
“측근들이라…그러고 보니 배에 승선하는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담당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관련 자료를 요청해 놔야겠군.”
툭!
“이미 받아놨어요.”
“일 처리가 빠른데?”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보아하니 리한 일행이 탑승한 시점부터 눈여겨보고 자료를 요청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사진과이름. 그리고 간단한 특기 사항을 확인하는 스미스.
“아스트라세 자작 일가 3명. 그리고 블러드 엘프 메이드 한 명과 줄리아 교단의여사제하나라…수행원이 너무 적기는 해도 딱히 수상한 구성은 아닌 것 같은데?”
“저하고는 생각이 다르시군요.”
“잘난 척하지 말고 어서 가르쳐 줘봐.”
핀잔하듯이 말하자 카밀라가 엉덩이를 긁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스미스씨가 말했던 것처럼 수행원을 적게 데려온 이유를 유추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동행자가 적어야 여차할 때 최대한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요.”
“확실히 배의 충돌 반동을 이용해서 도망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지.”
마치 널뛰기를 하는 것처럼 6명이 함께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줬던 리한일행의 탈출극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역시 이상한 구성이에요. 아스트라세 일가야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두 여성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흠. 단순하게 생각하면 후계자의 개인 수발을 드는 전속 하녀하고 주치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아니면 둘 다 이거라거나 말이야.”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새빨개졌다.
“그, 그, 그렇게 생각하면 더 이상하죠. 애, 애초에애, 애인이라면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데려올 필요가 없잖아요? 반나절도 머무르지 않았는데. 바쁜 일정으로 뭔가를 할 시간도 없었을 테고…”
“알았으니까 일단 심호흡이라도 하면서 진정해라. 누가 처녀 아니랄까 봐 허둥대기는.”
“처, 처, 처, 처, 처녀라니?! 즈, 즈, 즈, 증거 있어요???”
“너의 그 허접한 멘탈이 증거다!!”
“응앗?!!”
삿대질로 논파해버리자 희한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쇼크를 받았다.
“아,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은 그녀들을 선택해서 데려온 것도 틀림없이 목적이 있었을 거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따라왔다가 그냥 가버린 셈이니까요.”
“흠. 다른 목적이라? 도대체 그게 뭐지??”
“그것을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취조를 시작해야죠. 오찬 시간에 후계자 일행에 음식을 서빙했던 웨이터부터, 짐을 날라준 하인들, 다양한 수발을 들어준 노예는 물론이고 침실에 배정한 서, 성노예들까지. 후계자 일행이 이쪽에 넘어와서 무엇을 했고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모조리 체크해야만 해요.”
“하아. 그런 사람을 나열하면 최소한 수백 명은 넘어갈 텐데. 하나하나 물어보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 상상하기도 어렵군.”
“우리 에이전트를 모조리 동원하고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해야죠. 울고 불어도 시간제한은 내일 정오까지예요. 그리고 생각하기는 싫지만…제 가설이 맞다면 우리는 내일 정오에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라요.”
“최악의 상황이라고??”
“네. 어쩌면 그녀들은 아직…아니. 모르는 일이죠. 어쨌든 조금이라도빠르게 끝마치려면 빨리 시작하자구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어쩌면 허무맹랑할지도 모르는 뒷말을 토로하지 않고 집어삼킨 카밀라는 스미스와 함께 본격적으로 탐문 수사를 시작했다.
리한 일행과 마찬가지로 배의 한 층 전체를 통째로 배정받은 T-5는 중앙 회의실에 커다란 화이트 보드를 가져다 놓고, 수많은 직원과 노예들의 증언을 그곳에 분, 초 단위로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여기에 적혀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후계자는 동시에 2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군.”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는 스미스가 타임테이블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오찬 연회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냈을 거예요. 우리가 회의실에서 봤던 후계자는 이때 아스트라세 일가와 함께 선상에 나왔고. 또 하나의 후계자는 아마도 자신의 방에서 머무르고 있었을 테죠.”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단순한 잔상이 아니라 저런 분신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니. 역시 아티팩트를 사용한 건가?”
“그럴 거예요. 소지품 검사는 어떻게 통과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뱃놀이에는 무기를 반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도구도 함부로 가지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배에 오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법으로 신체 수색 및 소지품 검사를 하게 되는데, 작심하고 준비한다면 몰래 반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두 여성의 움직임도 이상하군. 한 명은 숙소로 안내하는 도중에 사라져 버렸고. 또 하나는 오찬 식사에 아예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야.”
“이 시간에 클레어라는 여사제는 틀림없이 또 하나의 후계자와 함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때가. 루크 장군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을 테고요.”
카밀라의 설명에 커피를 후르륵 들이마신 스미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그렇게생각하기는 하는데. 이 시간에 루크 장군의 거처에서 수상한 사람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좀처럼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야. 경비 체계에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던 모양이고. 그리고 접선했다고 해도 루크 장군을 어떻게 치료했다는 거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취조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죠.”
그렇게 재개된 탐문 수사는 자정을 넘어서 새벽 2시까지이어졌다.
더 이상은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화이트 보드의 타임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펭귄처럼 퀭한 눈으로 변해버린 두 사람.
“좀처럼 덜미가 잡히지를 않네요. 스미스씨.”
“…그러게 말이야. 확실히 네 말처럼 그냥 넘어가기에는 수상한 것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결정적인 스모킹건을 잡을 수가 없어.”
처음에는 카밀라의 의견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였지만 조사를 진행하면 진행할수록속속들이 발견되는 수상한 빵부스러기를 발견하고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여기. 후계자가방에서 성노예들을쫓아낸 타이밍과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루크 장군도 자신의 수발을 드는 노예들과 주치의를 모조리 내쳤어. 덕분에 이 시간에 두 사람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굉장히 수상하죠.”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오찬 중간에 후계자가 칼센 경에게 불려서 회의실로 이동했을 때. 아스트라세자작 일가가 일제히 일어나서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어. 그리고 10분 후에 다시 선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셋이 아니라 여섯 명 전원이 함께였지. 게다가 모두 후드를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옷차림까지 망토로 가려버리고 말이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잡았지.”
“평범하게 생각하면 이목을 피하고 싶었던 거겠죠. 귀족들이 너무 극성스럽게 따라다녔으니까요. 하지만 아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모습을 감추지도 않았어요.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몇몇 귀족들과 대화도 나눴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휴크 남작. 이 새끼는 또 뭐야? 왜 자기가 주인공처럼 설치고 있어?? 타임 테이블의 절반이 이 녀석이 떠들어대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주목을 받고 싶었으면…으휴!”
“동감해요. 혹시 몰라서 타임테이블에 기록해 두기는 했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기록 전체를 지워버려도 될 것 같아요. 하아-”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토한 카밀라는 지우개를 들어서 휴크에 대한 내용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다.
“처음부터 이 녀석은 시선 분산용이었다는 건가? 끄응. 그렇다면 소름 끼치는 일이군. 우리가 자신의 행적을 조사할 거라는 사실까지 않았다는거잖아.”
“하지만 성과가 있었어요. 저쪽이 가지고 있는 비장의 카드가 뭔지도 알 수 있을것 같기도 하고요.”
“정말이냐?”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말에 스미스가 반색하면서 물었다.
“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 허황된 가정이라서 아직 반신반의하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이만큼 대담하고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니까 아마도 틀림없을 거예요.”
“정말로 다행이군. 나는 아직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야.”
“역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여기에 있는 두 사람이었어요. 블러드 엘프 메이드와 줄리아 교단의 여사제. 다른 일행의 움직임은 전부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름이 카트리나하고 클레어라고 기입되어 있었어. 신원 조회를 해봤는데 클레어라는 여성은 벡워스 용병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골드 등급의 용병이라고 하더군. 카트리나라는 블러드 엘프의 정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말이야.”
“아마도 그녀가 박카이를 조종한 술사였을 거예요.”
“박카이를?? 아니. 확실히 블러드 엘프의 고유능력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A급 이상의…서, 설마?”
“제 생각이 틀림없다면 그녀들은 아마도…”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 잠시 심호흡을 한 카밀라가 천천히 눈을 뜨면서 뒷말을 뱉어내었다.
“아직 이 배에 남아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