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후랑추전랑(5)
“왓? 추태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제너럴. 루크!”
“칼센 경!”
“네. 장군님!”
“귀관은 지금 즉시 경비병들과 함께 이 혼란스러운 장내를 정리해 주게.”
“하, 하지만…”
당황한 그가 막시밀리안의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하자 매서운 호통이 쏟아졌다.
“귀관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가! 귀관이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것은 델링거 왕실과 오팔 왕국이네. 앵커리지 공화국이 아니라!!”
“헉?! 무, 물론입니다. 장군님!!”
“알아들었으면 빨리빨리 움직이게!!”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경례한 그가 무장들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웨이트! 지, 지금 이게 무슨 만행이오.제너럴 루크? 각하. 각하께서도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맞습니다. 장군! 지금은 장군이 끼어드실 때가…”
“갈喝!!!”
쾅!!
움찔!
사자후를 터트린 루크가 호랑이처럼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쏘아보자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움츠러들고 말았다.
“베리우스 후작!”
“넷?!”
“처음에 내가 공화국파의 총사령관직을 수락했을 때 귀공에게말해둔 것이 있었소. 그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테지만, 나라와 왕실의 품위는 훼손하지 말라고 말이오. 기억하고 있소?”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꼴사나운 추태란 말이오!!!”
“히이이익?!”
“막시밀리안 공!”
“예,예스!”
“귀공도 마찬가지요! 비록 귀국이 아국에게 막대한 경제 원조를 해주고 있다고는 하나. 사대에도한계는 있소. 그게 아니라면 귀국은 우리를 괴뢰국으로 보시는 것이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너럴.”
“그렇다면 특사의 대우는 여기까지요! 지금까지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겠지만, 앞으로는 모든 책임을 귀공 스스로 지시오! 더 이상 우리 왕국 귀족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소리오!!”
“아이 돈 노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듣기 싫소!!”
쾅!!
능청스럽게 빠져나가려고 하는 막시밀리안을 일갈해서 다물게 만든 그는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장내를 향해서 열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장들은 들어라!! 지금, 이 순간부터 왕국군의 이름을 자처하는 모든 군인은 이 총사령관 루크의 지시를 따라서 왕국의 명예와 품위와 명예를 훼손하는 어떤 일에도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행동도, 의지할 데 없는 몸을 의탁하려고 찾아온 방백 가문의 후계자를 볼모로 사로잡으려는 비도덕한 행위도,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의 귀족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에 일체의 협력을 금지한다!!”
웅성웅성웅성!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설마설마했는데…정말로??]
“자, 자, 자, 장군?!!”
“왓 더 퍽킹! 크레이지!!”
수많은 귀족의 눈과 귀가 모여있는 가운데 터무니없는 사실을 폭로해버리자 두 사람은 그야말로 기절할 듯이 놀라며 혼비백산했지만, 루크는 한술 더 떠서 그들을 노려보며 한층 강하게 쐐기를 박아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에게 경고하는데 노장의 말을 알아들었다면 쓸데없는 꿍꿍이를 꾸미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후계자의 제안에 응하시오! 만약에 이 말을 듣지않겠다면 이 루크 패스파인더는 더 이상 공화국파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총사령관의지위를 내려놓겠소!!”
“히끅?!”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탄 선억.
덕분에 딸꾹질까지 해버릴 정도로 놀란 베리우스는 그제야 자신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루크 장군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 정말로 그가 내가 알고 있던 그 무기력한 늙은이가 맞다는 말인가’
후작이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세월은 약 40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 노인은 누구보다도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살아있는 전설이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무인의 기상과 당당함에 경외심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항상 깔보고 무시해왔던 뒷방 늙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성과 허울뿐.
왕국의 모든 군인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을 규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고집스럽고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노친네들하고는 다르게 나라와 왕실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하면 크게 고집부리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다는 정도가 장점이라고 할수가 있었다.
베리우스가 루크를 얼마나 무시하는지는 협상장에서 보여준 태도만 해도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거기에 앉혀놓은 이유 자체가 후계자를 위압하기 위한 보여 주기용 이상도,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운기 행공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왜냐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육체가 너무나 노쇠해서 위엄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금강투합체를 사용하지 않으면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상태.
덕분에 루크는 공식 석상에서누가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내용 자체를 알지 못했고, 나중에 베리우스가 자신의 입맞에맞춰서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새겨 듣고 나서야 간신히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틀림없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
오히려 자신들의 모든 잘못을 폭로해버리면서 궁지로 몰아세우자 정신을 차릴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후작!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아니면 귀공의 권한으로 이 늙은이을 총사령관에서 해임하실 것이오?”
“각하!”
막시밀리안이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이번에는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 장군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잘 선택하셨소. 후작.”
“각하?!!”
“죄송합니다. 막시밀리안 공.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루크 장군을 이대로 해임해버리면 공화국파 자체가 해체되어버릴 겁니다.”
“그, 그럴 수가…”
믿을 수 없는 배신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왜냐면 이런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린 북방 3가의 방백들이 팔짱을 끼고서 주변을 둘러싸 버렸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할 말은 모두 끝난 모양이군. 그렇다면 각하. 이제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셔야겠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지금 당장!!”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군요. 처음부터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면 모두에게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 방백들에게는 귀띔이라도 해주셔야 했던 게 아닌가요? 아니면 뭐죠? 설마,우리까지 의심하고 있었던 건가요? 정말로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이 외국인은 누굽니까? 각하. 앵커리지 공화국하고관련이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우리는 소개를 받지 못했습니다만.”
“그,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몰려드는 질문 공세와 의혹의 눈초리에 진땀을 흘리는 후작의 시야에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물의 거인. 박카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는 진정한 의미로 자신이 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는 현재 하나만 들이닥쳐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2개나 떠안고 있었다.
하나는 T-7의 꼬임에 넘어가서 다른 귀족들 모르게 흉계를 꾸몄다가 들켜버린 것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내일 있을 협상을 원만하게 진행하려면 리한이 저지르고 가버린 사고조차도 자신이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대로 저지르고 가버린 건가???’
만약에그렇다면 리한이라는 인물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모든 형편이 좋아도 너무나 좋게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베리우스가 그렇게 피의 실드를 치면서 사태를 수습해주고 있을 때.
에이전트들과 함께 간신히 자리를 빠져나온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서 상부에게 급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를 확보하는 작전은 실패하셨다는 말씀이군요? T-5]
“며, 면목 없습니다. 엠프리스!!”
[한번의 패배는 병가지상사. 안타깝지만 당신에게는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어려울 것 같군요. 오팔 왕국에서 보여준 실적을 보면 더더욱이 말이죠.]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더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엠프리스!! 다음에는 반드시 그 녀석의 콧대를 꺾어놓고야 말겠습니다!”
화면 너머에 차양에 가려진 여인을 향해서 무릎을 꿇으며그렇게 사정했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실망했는지가 그림자만으로도 온전히 드러나고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 제가 당신을 그 자리에 임명했을 때 말씀하셨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그, 그건…”
[실력 지상주의인 우리 T-7에서 당신은 거의 유일하게 아버지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요. 그래서 제가 잘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더니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었죠?]
“저에게 충분한 시간과 예산을 주신다면 어, 어떤 일이라도 해 보이겠다고…”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기억하고 있었군요. 그래요. 그래서 당신에게 무엇이 모자랐었죠? 돈이 부족했나요? 아니면 시간? 아니면 지원??]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났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분해버려야 하지만, 저조차 거스를 수가 없는 위대한 아버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지금 즉시 당신을 T-5에서 해임하고 일반 에이전트로 강등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