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후랑추전랑(3)
“저에게는 충분히 지불할 여력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오브 코스. 불가능한 액수는 아니지. 하지만 와이? 우리 공화국이 어째서 그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지?”
“100억의 투자를 수포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50억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해버리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그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매그니피센트(magnificent)! 공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트있는 사람이로군. 왕국의 귀족들은 모두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기회가 되면 우리나라에 놀러 오지 않으시겠소?”
“마, 막시밀리안 공…”
대화의 수위가 점점 선을 넘으려고 하자 베리우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리한은 제방 자체를 박살 내버리고 말았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가격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제시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들 T-7이 본국에서 그렇게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는데도 은요호 기관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역전의 카드를 팔아주겠다는데 그 정도는 지불해 주셔야죠.”
“고, 고, 고, 공자!!! 도, 도대체 지금 무슨 막말을…”
“셧업!!!!”
당황하는 후작을 향해서 일갈한 막시밀리안은 긴 연기를 뿜어내면서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이제 보니 공자는 처음부터 공화국파가 아니라 우리하고 협상을 하려고 오신 모양이군. 아주 재미있어. 재미있는 사람이야.”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군요. 다시본론으로 돌아가서 제안에 응하시겠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NO.”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이군요.”
리한은 마치 예상했다는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오해하지는 마시오. 공자. 제시한 액수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니까.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계산이더군.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어. 도대체 그 숫자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을지 말이오.”
“지금 와서 굳이 알려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하하. you're right! 공자에게는 대답할 필요가 없을 테지. 하지만 그래도 말해줘야 할 거요. 우리가 원하는 정보는 무엇이든지 말이오.”
그 순간 장내의분위기가 일변했다.
막시밀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칼센이 나가는 문 앞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에이전트로 보이는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공자의 가치는 공자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고 말이오.”
“지금 저를 감금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감금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보호 조치라고 해주시면 고맙겠군. 솔직하게 말해서 공자라면…자신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제니아를 스스로 쟁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확실한 방법을 선호하거든.”
“후후후. 첩보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 치고는 거짓말을 정말로 못하시는군요. 막시밀리안님.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제가 두려워지신 게 아닙니까?”
궁지에 몰린 게 분명한 리한이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여유를 되찾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솔직하게 말해서 조금 놀랐으니까 말이오. 공자는 내 생각보다 조금 지나치게 재미있는 사람이었어. ”
“…보아하니 저를 인질로 붙잡고 부하들을 협박하시겠군요?”
“오브 코스. 50억 대륙 은화를 지불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싸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공자.”
이 말을 들은 리한은 한심하다는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이 만행을 누구도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까 후작 각하와 루크 장군님. 그리고 칼센 경까지 모두 공범인 모양이군요?”
“…”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남아있었는지 시선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괜히 이분들을 괴롭히지 마시오. 공자.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우국지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셔야지.”
“미안하지만 당신이 하는 비유는 틀렸어. 나는 작은 희생양이 아니고 이런 하찮은 수작에 놀아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자신의 원래 성격을 드러낸 리한이 대놓고 반말을 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하하하하하하! 마지막까지 정말로 굉장한 허세를 부리시는군. 하지만 어쩐다? 공자의 실력이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이 회의실에는 마법이 통하지 않소. 게다가 왕국 최고의 무장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지. 부하들을 데리고 왔다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구려.”
마지막 문장은 조롱이었다.
아무리 그가 아스트라세 일가를 데려왔다고 해도 s급 무장인 루크와, A+의 무장 칼센. 그리고 미지수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막시밀리안과 에이전트들을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
어차피 무슨 짓을 했어도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었지만 리한은 거꾸로 조소를 금하지 못했다.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야. 막시밀리안. 처음부터 나는 부하들을 일부러 데리고 오지 않았어. 일이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있었거든.”
“불 쉿!!”
“상향조정은 있어도 하향조정은 없다고 했지?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가장 싸게 팔아주겠다고 할 때. 순순히 받아들였어야지.”
“오케이. 쓸데없는 수다와 허세는 여기까지. 미스터 칼센? 공자님을 지금 당장 스위트 룸으로…”
화르르르륵!
이 말이 끝나기 전에 리한은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같은 시각.
선상의 한 테이블에서 망토를 쓰고 있는 부하들과 함께 태연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던 진짜 리한은, 자신의 분신이 스스로사라져서 흡수되는 것을 느끼고 냅킨을 들어서 입술 주변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떠날 시간인모양이군.”
“배를 호출할까요?”
루돌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주저 없이 신호탄을꺼내서 하늘로 쏘아 올렸다.
퍼퍼퍼퍼퍼펑!
밝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선명한 색상을 만들어 내는 아스트라세 가문의 문장이 화려하게 수를 놓았다.
오오오오오오오!!
짝짝짝짝짝짝짝!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대다수의 귀족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는지 탄성을 터트리면서 손뼉을 쳤지만, 깜짝 놀란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버리고 말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신경 쓰지 말고 길이나 비켜라. 지나갈 수가 없지 않으냐?”
“아, 네. 죄, 죄송합니다.”
대귀족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말하자 순식간에 위축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비상! 비상!선단에 있는 모든 경비 인력들에게 알린다. 지금 당장 아슈킬 가문의 모든 광계자 신병을 구속해라! 저항한다면 무력 사용도 허가하겠다.다시 한번 반복한다…]
통신 마법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이리나.”
“네, 도련님.”
파사사사사사사삿-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출수한 무투기가 주변에 몰려들은 경비병들을 모조리 덮쳐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머리만 남고 모조리 얼어붙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병사들.
“꺄아아아아아악!”
“고, 공자님?!”
주변에 있는 귀족들의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리한 일행은 그런 반응을 무시해버리고 마치 산책을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배의 후미를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솜씨가 더 좋아졌구나. 훌륭하도다. 나의 딸이여.”
“과찬입니다. 아버님.”
“딱히 수련에 매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정말로 성장하셨군요. 누님. 과연.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
“죽인다.”
“틀린 말은 아니잖느냐? 이리나.”
화끈!
“도, 도련님까지 그렇게 짓궂은 말씀을…하,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부끄러워하자, 루돌프 부자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처럼 얼굴이 새파래져 버리고 말았다.
“보셨습니까? 아버님. 딸내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는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대놓고 차별 대우를…”
“그, 그렇구나. 아들아. 도련님! 잘 들으십시오! 인생의 선배이자 결혼의 유경험자로서 충고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도망치십시오! 이게 다 내숭입니다. 내숭!! 으아아아악?!”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천기를 누설하다가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희생양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난리와 비교하면 평화롭다 못해 한가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머, 멈추십시오. 공자님! 신병을 구속하라는 후작 각하의 엄명이 있었습니…”
“빙폭산!!!”
“으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아아악!
해일처럼 일어나는 루돌프의 무투기에 휩쓸려버리며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리는 파도 형태의 형상물 속에 갇혀버린 경비병들과귀족들.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지만 A급 무장으로서도 완숙한 경지에 도달해있는 그를 막을 실력자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경비병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데는 혼란스러운 장내의 상황도 한몫을 했다.
“꺄아아아아아악!”
“모두 도망쳐!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가 미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조리 살해당할 거야!!”
“살고 싶으면 다들 강으로 뛰어들어! 아니면 설영빙천공으로 산 채로 얼어붙는다!!”
“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손님 여러분!! 저희가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니까…젠장, 제기랄!!”
풍덩!!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어서 누구도 죽지는 않았지만, 비주얼적으로도 무시무시한 설영빙천공이 경비병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얼려버리자 수백, 수천의 귀족들이 아비규환이 되어서 날뛰는 바람에 선상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경비병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이에 리한 일행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배의 후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