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후랑추전랑(2)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소. 공자.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군요. 저는 아직 막시밀리안님의 직업과 신분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공화국을 대변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공화국파를 대변하는 겁니까?”
“양쪽 모두요.”
“후각 각하께서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렇소.”
베리우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버리자 리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국을 대표하는 귀족이라는 자가 이렇게 배알도 없이 외세에 의지하고 있다니 한심하기 이를데가 없군.’
“보아하니 공자께서는 각하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오?”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뭣이?!”
“하하하하하. 언빌리버블! 공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사람이야.”
당황하는 후작하고는 다르게 막시밀리안은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쓸데없는 아첨은 필요없으니까 본론으로 돌아가시죠.”
“오케이. 오케이. 돈 비 시리어스(don't be serious.)”
정색하면서 말하자 진정하라는 듯이 제스처를 취하고 품속에서 얇은 필터담배를 꺼내다니 금속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찰칵-
“후우우우우우-”
마치 자신의 안방처럼 무례할 정도로 태연하게 연기를 뿜어내는 막시밀리안.
“제니아를 원하시오? 공자.”
“당연한 것을 물어보시는군요.”
“후후후후. 그렇다면 대화가 빠르지. 병력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겠소. 각하의 휘하에 있는 북방군은 물론이고, 세 방백의 영지군. 그리고 필요하다면 왕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우리 공화국 특무부대 전체를 동원해서라도…”
“한 명도 지원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케이. 제로…제로??”
깜짝 놀란 막시밀리안이 들썩거리는 바람에 담뱃불이 튀면서 잠시 소란이 일어나버리고 말았다.
“지,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공자.”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처음부터 저는 우리 영지의 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니아를 어떻게 도모하려고…”
“간단한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영지에 골칫덩어리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돌로레스. 저희 가문의 명예를더럽히는 그 사악한 년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려가겠죠.”
“하하하하하! 프리크(freak)!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공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 그가 자신의 금발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안 될 것은 뭡니까? 오히려 왕국군의 절반을 동원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죠.”
“불 쉿! 우리 공화국파가 그 계집이 문제라는 사실을 몰라서 여태까지 내버려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시오? 완전히 봉쇄된 제니아에 들어가는 것은 공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오! 거기에 왕국 최고의 실력자들이 호위를 하고 있는 돌로레스 부인을 암살하시겠다? 하하하하하하!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우리 에이전트가 진작에…”
“에이전트?”
“웁스, 마이 미스테이크. 지금 했던 말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해주시오. 공자.”
능청스럽게 이런 요구를 대놓고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처구니가없었지만, 막시밀리안은 아무래도 자신의 진짜 정체를 마지막까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애니웨이! 공자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무모한 작전은 허락할 수 없소. 보아하니 공자는 공자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모양이군. 심지어는 자신이 쥐고 있는 정보의 가치에 대해서도 말이오.”
“당신이 허락하거나 말거나 우리 가문의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협상 재료의 가치도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 키딩 미?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군. 왕국군 절반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데도 마다하면서 허튼소리를 지껄이다니.”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자 리한은 정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막시밀리안님. 나는 후계자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 영지 전체를 피바다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사악한 계집 하나 때문에 조상 대대로 우리 가문을 위해서 일해 온 충성스러운 가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지도 않을 것이며, 외세의 내정간섭에 휘둘리는 벌거숭이 왕이 되지도 않을 겁니다!”
“그게 바로 허황한 이상론이라는 거요. 공자. 공자도 어른이 되려면 때로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지.”
막시밀리안이 라이타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면서 조소했다.
“어쨌든 이 건에 대해서는 논쟁할 생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바라고 있던 군대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오케이. 언더스탠드! 기다리다가 자버릴 뻔했소.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요? 공자.”
중요한 대목이었기 때문에 리한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50억 대륙 은화.”
“…”
순간적으로 장내가 조용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그리고 3서클 이상의 마법사 5천 명을 우리 가문에 최소 15년 계약으로 파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 모양이군.”
손바닥으로 귀를 두드려대면서 청각을 점검한 막시밀리안이 그렇게 말했다.
“고, 공자. 도, 도대체 그게 무슨…”
베리우스만 놀란 게 아니라 지금까지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있던 루크마저도 터무니없는 액수에 놀라서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참고로 이것은 최소 제시액입니다. 상향조정은 있어도하향조정은 불가합니다.”
“오케이. 오케이. 한 가지 정정해야겠군. 공자는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게 아니었어.”
막시밀리안은 드디어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느닷없이 주먹을 들어서 눈앞에 테이블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쿵!
“a damned psychopath(이 미친 정신병자새끼)!!”
“거절하시겠다면 이 협상은 없던 것으로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공자!!”
“스톱 라이트 데어! 떠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지. 감히 이따위 제안을 들고 오다니처음부터 우리하고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냐!!”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외쳤지만 리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막시밀리안님. 확실히 이 요구는 다른 나라에는 억지스러운 액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륙 최고의 자본력을 보유하고 앵커리지 공화국이라면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쪽이야말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요구가 정말로 터무니없는지를 말입니다.”
“그건!!…흠?”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생각해서 거칠게 씩씩거리던 막시밀리안은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생각에빠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케이. 이번에는 내가 사과하도록 하지. 미안합니다. 공자. 잠시 스마트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다시 자리에 앉아도 되겠군요.”
아무래도 그도 머리 회전이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군. 공자는 50억 대륙 은화라는 금액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소??”
일반인이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아득한 액수.
겨우 1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리한에게 그것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원대한 비전에 관해서 과장되게 떠들어대기는커녕 오히려 너스레를 떨면서 공을 넘겨버리고 말았다.
“무지한 저에게 직접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막시밀리안님.”
“I'm speechless. 뭐, 좋소. 그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오겠다면 원하는 대로 놀아봐 주지. 공자도 알고 있을 테지만, 재작년부터 우리 앵커리지 공화국은 제국의 침략 야욕을 막아내기 위해서 동맹국들에게 포괄적인 재정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록히드 플랜이라는 거죠?”
“들어봤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세간에서는 이것 때문에 우리 앵커리지 공화국이 돈으로 유라서스 대륙을 사려고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만 어림없는 소리지.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물론입니다. 막시밀리안 공. 감히 공화국의 순수한 의도를 곡해하려는 악의 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통탄스럽고 애석할 뿐입니다.”
간도 쓸개도 없는 베리우스의 모습에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지만 덕분에 그는 의기양양 해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애스 유 씨. 우리도 성인군자는 아니다 보니 이렇게 훌륭한 파트너에게는 자연스럽게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소리요. 특히나, 오팔 왕국처럼 여러 가지로 기대가치가 높은 나라라면 푼돈을 아낄 수는 없지.”
여기까지 말하고 담배에 불을 붙인 막시밀리안은 하얀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서 다시입을 열었다.
“100억 대륙 은화입니다. 공자. 우리가 작년부터 공화국파 전체에 지원한 액수 총액이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