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후랑추전랑(1)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협상 재료는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혈마법사들과 내통하고 있는 배신자 명단.
여기에 대해서는 베리우스도 지금쯤 짐작 가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리한은 그런 심증을 넘어서 정확한 명단 리스트와 함꼐 그들이 꼼짝 못할 증거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교섭 재료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은요호 기관과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물리적인 증거들이었다.
넥타르에 잠입하는 모든 과정을 촬영한 영상기록부터 투스트로가 토사구팽을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치부책, 그리고 그들이 꼼꼼하게 적어놓은 다양한 장부를 통해서 제국이 이 단체를 어떻게 지원하고 계획을 수립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한 마디로 이 자료는 제국의 만행을 온 세상에 폭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타국에서 마음대로 활개를 치면서 첩보와 파괴 공작을 펼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것이다.
첩보전에서 매번 “또 졌어?”를 반복하는 T-7에게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탐나는 물건일 터.
베리우스가 아무리 비겁한 수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갑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리한은 이런 사실을 상기하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은 네 장단에놀아주도록 하지. 어디 한번 무엇을 준비했는지 밑천을 모두 드러내 봐라.’
하지만 이런 속내를 알 리 없었던 베리우스는 그가 협상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위축당하는 것처럼 보이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 그렇지. 어린 녀석이 외교 협상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어? 어쩌다 운이 좋아서 은요호 기관의 음모를 막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어른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좋은 사회 경험을 시켜주도록 하지. 후후후후후.’
“크흠, 크흠!”
잠시 헛기침을 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위압적인 어투로 목소리를 깔았다.
“연회를 즐기는 와중에 급하게 불러서 미안하오. 하지만 공자에게는 정말로 실망했소. 아주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더군.”
‘실수는 개뿔.’
어처구니없는 수작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당황하는 척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을 받았다.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각하.”
“조금 전에 굉장히 불미스러운 제보가 들어왔소. 하지만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지. 공자는 이 회합에 어째서 참석한 것이오?”
“불미스러운 제보라니 도대체 누가 그런…”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니까 말을 돌리지 마시오! 지금은 공자에게 어째서 이 회합에 참석했냐고 묻지 않았소!!”
‘말을 돌리는 게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군.’
자신을 세차게 몰아붙이는 이유가 ‘제보’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출처나 근거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리한은 이 정체불명의 제보자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베리우스의 뇌피셜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지.’
“저는 그저 이 회합이 애국자들의 모임이라고 주선을 받았을 뿐입니다.”
“흠.”
리한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해버리자 예상했던 대로 그렇게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는지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가 바라는 정답에 가까운 대답은“공화국파에 합류하고 아슈킬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 지위를 되찾기 위한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지금 분위기 속에서 그것을 솔직하게 말했다가는“그러면 우리 파벌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증거를 보여달라.”는 식으로 몰아세워서 가지고 있는 모든 교섭 재료를 대가 없이 가져가려고 할 것이었다.
‘날강도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심보 자체가 고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만 이미 노선을 그런 식으로 잡아버렸으니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터였다.
“애국자들의 모임이라고 알고 오셨다? 그렇다면 왕국을 위해서 어떤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으시겠구려?”
예상했던대로 말꼬리를 잡고 집요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마땅히 해야죠.”
“말이 조금 모호하구려. 공자. 그 말은 꼭 처지가 어려워지면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하오만…”
‘당연하지.’
리한은 그렇게 받아쳐주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짐짓 흥분한 척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체 지금 무엇을 시험하시는 겁니까? 각하! 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선의를 가지고 이 회합에 참가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저를 모함해서 이렇게 몰아세우시는 거라면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서 고변을 하라고 해주십시오! 이 리한 폰 아슈킬. 하늘을 우러러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크흠, 크흠! 아니,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는 없으니까 다시 자리에 앉으시오. 공자. 본인도 딱히 공자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하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오.”
‘아니기는 개뿔.’
예상했던 대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세게 나가자 금방 꼬리를 내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리한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쐐기를 하나 박아두기로 했다.
“아니요. 각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는확실하게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객지에서 3년 동안 떠돌아다녔다고는 하나. 천년 가문의 후계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며 명예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니 만약, 다시 한번 이런 얼토당토않은 의문이 제기된다면 저 또한 이 회합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하선하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크흠! 다, 당연한 말씀이오. 그렇게 흥분하지 않아도 여기에 있는 누구도 공자의 행실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만 진정하시구려. 크흠. 거 참, 공자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성격인가 보구려.”
결국, 베리우스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왕도의 치열한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능구렁이치고는 싱거운 패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애초에 상대가 어리다고 지나치게 깔보면서 뻔한 수작을 부렸기 때문에 상대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짜 협상은 오히려 지금부터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슬슬 앞으로 나설 때가 된 것 같은데?’
루크는 여전히 이 상황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리한이 쳐다보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남의 일처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방관하고 있는 금발의 남자였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관망을 멈추고 박수를 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재미있군요. 재미있어요! 설마 했는데 베리우스 각하를 이렇게 쉽게다물어버리게 하시다니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마, 막시밀리안 공!”
“괜찮습니다. 각하. 저에게 맡겨주세요! 공자님? 잠시 진정하시고 이번에는 저하고 대화를 나눠보시지 않겠습니까?”
장난기 가득한 태도로 당황하는 후작을 진정시키면서 앞으로 나섰지만, 리한은 싸늘한태도로 맞받아쳤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만?”
“하하하하하하! 쏘리, 쏘리. 마이 미스테이크!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도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었군요. 제 이름은 막시밀리안 파비오라고 합니다! 편하게 맥심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막시밀리안님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오우. 지나치게 차가운 반응이로군요? 하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공자. 제가 자기소개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각하께서 가로막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마, 막시밀리안 공…”
모든 책임을 전가해버리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베리우스를 보는 것도 재미있기는 했지만, 리한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으며 냉담한 반응을 고수했다.
“죄송하지만 각하! 소생은 어째서 오팔 왕국을 대표하는 대귀족이신 각하께서 저렇게 무례한 외국인을 곁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생이 비록 불초한 몸이기는 하나, 감히 참언하건대 저자를 이 자리에서 당장 쫓아내 버리십시오!”
“마, 말을 삼가시오! 공자!! 이분이 감히 누군 줄 알고 그런 막말을…”
“오케이, 오케이! 알겠으니까 진정하세요. 두 분다. 릴렉스, 컴다운~.”
후작이 당황하면서 언성을 높이자 막시밀리안이 재빠르게 끼어들어서 중재했다.
“내가 먼저 사과하겠소. 공자! 우리 앵커리지 공화국에서는 귀족이라는 개념이 왕국이나 제국하고는 다소 다르게 받아들여지다 보니, 잠시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로군. 문화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이니 부디 너그럽게 받아주시오.”
하지만 리한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쉽게 주도권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후작 각하께서도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무, 물론이오. 공자. 그러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소.”
“그렇다면 참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막시밀리안이 졌다는 것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이런…지금까지 왕국의 여러 귀족을 만나봤다고 생각했지만 공자처럼 꽉 막힌 사람은 처음이로군.”
“제국에 가면 제국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저 또한 왕국의 법도를 우선했을 뿐입니다.”
“알았소, 공자. 이거야 원.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가는 정말로 피곤해지겠군. 그렇다면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저도 동의합니다.”
리한은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이어지는 협상 내용에 온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