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뱃놀이(8)
잠시 후.
선단 전체가 도개교로 연결되면서 오찬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24시간 마라톤으로 쉬지 않고 진행하는 선상 파티였기 때문에 오찬 연회라고 해봤자 특별하게 달라지는 점은 없었지만, 귀족들은 이 틈에 다른 배로 객실을 옮기거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교우 관계를 넓혀나갔다.
하지만 리한 일행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자님! 저는 헤이스팅스 가문의 윌리엄 자작이라고 합니다! 40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왕국의 정통 무가로…]
[새치기하지 마시오. 노부야말로 대대로 궁정 학자와 마도사를 배출한 진정한 명가의 일원이라오! 어떻소? 공자. 저쪽에서 천천히 왕국의 미래에 대해서라도 논의를 하시는 게…]
[아직 미혼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 딸은 어떠신가요? 이래 보여도 폴카 최고의 미인이 자자하답니다. 정말로 곱죠? 호호호호호호!]
“후후후후후.”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군.’
자신에게 몰려드는 인파를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그렇게빌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싫어하는 데다가 하나같이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내고있기에 혐오감과 분노, 증오라는 스택이 차근차근 쌓아 올려지는 상태.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 앞에서 자신의 본래 성격을 드러내지는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퍼져나가는 역겨움을 참아내면서 명가의 모범적인 귀공자를 연기해 나갔다.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이렇게 비겁한 수단을쓰다니…’
사태의 발단이 된 것은 베리우스 후작이었다.
원래부터 죽었다고 알려진 명가의 후계자가 살아서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는데, 혈마법사 집단을 토벌했다는 내용을 쓸데없는 과장과 무용담까지 섞어서 뱃놀이 연회에 의도적으로 퍼트려버린 것이다.
덕분에 리한 일행은 오늘 연회의 주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소개하고 조금이라도 친분을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
오죽했으면 사교계 파티에 비교적 잔뼈가 굵은 루돌프조차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하하하하하!아니 뭐, 제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게 있겠습니까? 그 무시무시한 혈마법사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후계자님의 탁월한 영도력과 아스트라세 일가의 활약 덕분이었죠. 저야 뭐, 뒤에서 아주 작은.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도움을 몇 가지 제공해 드렸을 뿐인데요. 으하하하하하하!!]
[어머나 세상에! 겸손도 하셔라~]
[세상에 도시의 지하에서 그렇게 흉흉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정말로 꿈도 꾸지 못했어요!]
[맞는 말씀이예요. 휴크 남작님이라고 하셨죠? 오늘 처음 뵙기는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재야에 파묻혀 계셨다니. 다음에 꼭 한 번 영지에 방문해 봐야겠네요.]
[으하하하핫?!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하하하하!]
‘신났군. 신났어.’
보잘것없는 작은지방 영주가 사교계 주역에 포함되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니 광대뼈가 춤을 추면서 승천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착장에서 더 강하게 두드려 팼어야 하는데.’
오싹-
[응? 어, 어째서 갑자기 한기가…]
리한이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아쉬워하자 한기가 몰려오는지 부르르 떨었지만, 이렇게 몰려드는 인파를 상대하는 사이에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2~3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진이 거의 다 빠져나갈 무렵.
“실례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후작 각하께서 공자님과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모셔가도록 하겠습니다.”
[후작 각하께서요?]
[하아, 아쉽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아까워라! 내 매력에 거의 다 넘어왔었는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살아났다는 생각밖에는 들지가 않았다.
동시에 베리우스를 향한 분노도 무럭무럭솟아올랐다.
왜냐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지치고 피로하게 만들려고하는 노림수가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또한 리한이 거래를 하려고 뱃놀이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전부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미끼를 덥석 물어 올릴 정도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흔들어 보였기 때문에, 교섭 재료가 상당하다는 것과 거래 규모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의 환대와 꽃다발은 구밀복검. 하나같이 모두 치밀하게 계산한 의도가 깔려있고 독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누가 정치인 아니라고 할까 봐 더럽고 치사하게 행동하기는…’
파지지지직-
당연히 이런 수작에 넘어갈 리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스터 코어의 힘으로 피로를 모조리 날려버렸지만, 여기에서 괜히 멀쩡한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제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초조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일부러 진이 빠진 것처럼 연기를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각하 덕분에 살았습니다. 휴- 갑자기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다니…”
“하하하하! 이게 다 리한님께서 백워스에서 펼친 활약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호탕하게 웃으면서 안내를 하는 사람은 칼센이라는 남자로 블랙 이글 기사단의 단장이자 후작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지금 나누는 대화는 통신 마법으로 후작의 귀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무슨 이유로 저를 부르시는 겁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조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씨익-
살짝 스쳐 지나가는 그의 웃음을 리한은 놓치지 않았다.
“글쎼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단한 일은 아닐 겁니다.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지요.”
말을 교묘하게돌리는 것을 보니 이대로 협상을 진행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원래 지치고 피곤하면 복잡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데다가, 이런 말까지 들어서 안심해버리면 뇌 구조 자체가 변해서 상황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쉽게 말해서 방심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포석을 까는 것을 보니까 협상장에도 뭔가 꼼수를 부려놨겠군. ’
그야말로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모조리 동원하는 비겁하고 아니꼬운 수작이 아닐 수 없었지만, 리한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선내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할 와일드 카드를 벌써 확보해놓았기 때문이다.
똑똑똑똑!
“공자님을 모셔왔습니다. 각하!”
[안으로 모셔라.]
쿠구구구구구궁-
나직하게 들려오는 대답에 이어서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회의장의 쌍여닫이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진짜 실세는 여기에 다 모여 있었군.’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보란 듯이 위압감을 주는 높은 상석에 앉아있는 세 사람이 자신을 심판하려는 듯이내려다보는 형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와서 앉으시오. 공자.”
중앙에 앉아서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은 물론, 베리우스 후작.
처음에 사근사근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팔짱을 끼는 거만한 자세로 처음부터 압도해버리겠다는 듯이 목소리를 깔고 있었다.
그리고 우측엔 이번 일에는 참견하지 않겠다는 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루크 장군이 보였다.
앉고 있는 의자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체구.
올백으로 뒤로 넘기고 있는 성성한 백발에 멋들어진 콧수염.
원래 나이는 158세라지만 얼굴만 봐서는 5~6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영광의 상처가 가득한 두꺼운 팔뚝은 아름드리나무만 한 두께에 힘차게 꿈틀거리는 핏줄은 마치 용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모습만 보면 노쇠하고 약해졌다는 말은 헛소리처럼 들릴 정도다.
그리고 왼쪽에는 이번 협상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키플레이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름은 아직 몰랐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루크 장군님. 그리고…”
“통성명은 필요 없으니까 어서 앉으시오.”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자 베리우스가 방해를 했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리한은 일부러 짐짓 당황한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안내를 받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하지만 굳이 소개를 받지 않아도 왼쪽에 있는 미지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일단, 알렌 왕세자는 아니다.
뱃놀이 자체가 공화국파의 최대 회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도 참석해서 충성맹세를 받아야 했지만, 그 역할을 델링거 왕가의 최대 심복인 베리우스가 대신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안전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파벌 최후의 보루로써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측근 중에서도 일부만 아는 비밀 모처에서 숨어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가능성은 배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유수한 방백들을 제치고 베리우스 후작의 왼쪽 자리를 차지할만한 실세는 누구인가?
신원 불명의 남자는 자신과 비슷한 비교적 젊은 나이로 보였고 왕국의 귀족들은 별로 즐겨입지 않는 새하얀 정장 슈트에, 짧은 금발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다듬고 있었다.
눈이 시원해지는 잘생긴 외모의 신사.
‘저자가바로 앵커리지 공화국 최고 첩보기관인 T-7에서 파견한 사람이겠군.’
리한은 이번 협상에서 자신이 정말로 상대해야 하는 인물을알아보고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