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뱃놀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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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시각, 합류 포인트.
쿵쿵! 쿵쿵! 쿵쿵! 쿵쿵!
베르디 강에서 베리우스 후작의 선단을 발견하자 완전무장한 상태로 도열한 팔콘 전사들이 힘차게 발을 구르며 기치 창검을 바닥으로 두드려댔다.
찰칵, 찰칵찰칵찰칵!
조명을 깜빡거려서 간단하게 접선 신호를 주고받자 서로를 향해서 천천히 접근해 갔다.
전사들의 표정에서 마치 선상 전투를 앞둔 것 같은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리한은 이것이 전쟁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각오를 다졌다.
“도개교를 내려라!!”
쿠구구구구구궁!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후작의 전함 위에서 코르부스(까마귀)라고 불리는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철컹!
원래대로라면 까마귀 부리라고 불리는 날카로운 충각을 상대편 갑판에 꽂아 넣으며 도개교를 연결해 고정하는장치였지만, 이번에는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갑판에 고리를 연결해서 흔들다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가자.”
“네, 도련님!”
리한의 말에 아스트라세 일가가 힘차게 화답하면서 뒤를 따랐다.
많은 인원이 올라탈수는 없었기 때문에 휴크는 휴크대로 측근 두 명을 선별했고 양쪽 모두 수행하는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루돌프 부자와 이리나, 그리고 클레어와 카트리나까지 겨우 5명.
무장을 해제한 가벼운 연회복 차림으로 마차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넓은 도개교를 지나서 반대편으로 향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
둥둥둥- 둥둥둥둥둥-
길게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군악대가 힘차게 북을 두드려댔다.
“아슈킬 가문의 정통 후계자. 리한 폰 아슈킬과 8명의 수행원께서 입장하십니다!”
오오오오오오!
짝짝짝짝짝짝짝!
소개 인사에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귀족들이 박수갈채를 쏟아내었고, 도개교 앞까지마중을 나온 베리우스 후작과 방백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하하하하!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공자!! 그대의 방문을 이 늙은이가 정말로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소!!”
염소수염에 진한 구레나룻.
갈색 머리카락을 소가 핥은것 같은 헤어스타일로 다소 간사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는 베리우스가 양팔을 활짝 펼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과분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명망이 높은 여러 군후들께서 하찮은 소생을 맞이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겸양이 지나치시오. 공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누가 천년 가문의 적통을 홀대하겠소? 게다가 공자의 놀라운 활약상을 서신을 통해서 전달받았다오. 정말로 놀라운 기사奇事가 아닐 수가 없더구려. 죽었다고 알려진 후계자가 생환했다는 것도 대단한 뉴스인데 그 간악하기 이를 데가 없는 제국 마녀와 혈마법사들의 음모를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서 막아내줬으니 말이오!”
다른 방백들을 쳐다보면서 말하자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쳐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후작 각하! 공자의 활약은 그야말로 왕국 모든 청년이 본받아야 하는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명가의 태생은 다르군요. 소생의 불초한 자식도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하!”
뾰족한 수염에 머리가 반쯤 벗겨져 있는 중년의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이름은 지그문트 로체스 백작.
이웃집 아저씨처럼 만면에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리한에게는 그렇게 달가운 태도는 아니었다.
“그렇고말고요. 호호호호! 게다가 이렇게 귀엽, 아니 출중한 외모의 귀공자라니. 부디 소첩과, 아니 소첩의 딸을 시집보내서 사돈을 맺고 싶을정도로군요.”
자신의 신체를 과도하게 노출하고 있는 빨간 드레스 차림의 중년 여성이, 새빨간 입술 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자신의 뺨에 난 점을 뱀 같은 혓바닥으로 슬그머니 핥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 여성이 캐시 블랙우드 여백작이겠군. 천박한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꼴을 보니까 연하의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야.’
리한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짝 거리를 두려고 할 때, 베리우스 후작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방백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리카노 백작은 왜 아무런 말도 없으시오?”
“아, 네! 무,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째서인지 마지못해서 대답하는 기색이 역력한 남자.
귀족치고는 살이 찐 통통한 체형에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 가득한 그는 아무래도 유일하게 자신의 방문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한은 베리우스 후작을 제외한 나머지 방백들에게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상부 갑판에서 다른 귀족들과 홀로 떨어져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여성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실례지만 저분은 누구십니까?”
“아, 저 사람은…”
“신경 쓰지 마시오. 공자. 저것은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니까 말이오.”
후작이 하려는 말을 가로챈지그문트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리한은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크레이그 가문의 가주. 사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도 방백 중 하나신데 말씀이 다소 지나치신 게 아닐지…”
“흥! 저런 미천한 계집이 앞으로 얼마나 저 자리에서 버티고 있을까? 두고 보시오. 앞으로 반년 이내에 저 하찮은 가문을 왕국 역사에서 사라지게…”
“자자자! 그런 흉흉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시고. 공자의 일행을 언제까지 여기에 세워두려는 것이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머무르실 선실부터 안내해드리겠소.”
말이 과격해지려고하자 베리우스가 급하게 끼어들어서 중단시켰다.
짝짝!
“부르셨습니까? 각하!”
“어서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드려라!”
“네, 알겠습니다. 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덕분에 지그문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리한은 그 속내를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로체스 가문과 크레이그 가문의 영지는 굉장히 가까웠지? 보아하니 반년 안으로 군대를 일으켜서 멸망시키려는 모양이군.’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 없다는 말처럼 가까운 영지의 영주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지그문트가 품고 있는 반감은 단순히 세력 확장이나이권에 대한 것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찮은 가문이라…하여간 특권 계층이라는 것들은 생각하는 게 모두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군.’
어째서인지 자신을 향해서 와인 잔을 비추고 있는 사라를 잠시 쳐다본 리한은, 후작의 하인들에게 선실로 안내를 받는 도중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카트리나.”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스르르르륵-
명확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심전심으로 알아들어서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녀를 어디로 보내신겁니까? 도련님.]
[미안하지만 네가 알 필요는 없다.]
귀띔으로 살짝 물어보는 이리나에게 다소 냉정하게 대답한 리한은 금방 배정받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작 각하께서 특별히 이 층 전체를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 여기 전체를 말이냐?”
루돌프가 깜짝 놀라서 되물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충 시야에 들어오는 객실만 적어도 3~40개.
전함 자체의 규모가 워낙 크기도 했지만, 공간 자체가 한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넓은 장소를 거리낌 없이 내어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른 방백님들에게도 원래 이런 공간을 내어드리는 거냐?”
“아닙니다. 전부 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특별히 후계자님을 성심성의껏 모시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다른 방백님들에게 양해도 구해놓았으니 사양하실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셧습니다.”
‘호의를 베풀어서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겠다는 속셈이군.’
후작의 의도를 알아차린 리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배려에 감사한다고 말씀드려라.”
“괜찮습니까? 도련님.”
“걱정하지 마라. 굳이 특혜를 주겠다는데 일부러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이 층에 배정되어있는 노예들이 수발을 들어드릴 예정입니다만, 혹시 불편하신 점이나 시킬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호출해 주십시오.”
인수인계를마친 하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떠나갔다.
배정받은 선실에 들어서자 과연 특별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화려한 스위트룸이 자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배 안에 아쿠아리움을 만들어 놓았다거나 기묘한 형태의 장식품에, 명화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볼거리들이 있었지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킹사이즈 침대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다섯 명의 성노예들이었다.
하나같이예쁜 미소녀들이지만 인형처럼 표정이 없었다.
속살이 비추는 얇은 네글리제를 입고 머리에는 선물 포장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리본을 묶어놓았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리한은 진심으로 환멸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악취미로군.”
그가 아무리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이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은 있었다.
차라리 골렘의 쿼터였던 12호가 더 인간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리한은 그녀들에게 손을 대지 않고 모조리 방에서 내보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