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뱃놀이(4)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오팔 왕국의 내부 사정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기득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북방 3가에 맞서는 남방 신흥 세력들의 도전.
조금 더 대국적으로 시야를 넓혀서 바라보면 크게 테르할 제국과 앵커리지 공화국의 패권 다툼의 영향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구도를 만들어낸 인물은 다름 아닌 제국의 마녀.
은요호 기관의 수장 로티나였다.
가장 먼저 앤서니 왕녀를 끌어들여서 판을 짜기 시작했고.
식민지 영토와 이권 독점을 탐내는 젝플리스 가문을 제국파로 끌어들였으며, 허영심 많은 돌로레스에게 독사 같은 달콤한 유혹의 말을 속삭여서 자신의 열렬한 신봉자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녀의 작품이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고들어서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마스터 퍼펫.
당연하지만 사라에게 앤서니 왕녀의 매력을 가르쳐준 것도 로티나였다.
[왕녀의 측근이 되세요. 그리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녀를 휘어잡으세요.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겁니다. 그녀와 함께 이 낡아빠진 기득권을 무너트리고 오팔 왕국에 새로운 깃발을 휘날리세요. 바로 당신의 가문인 크레이그의 깃발을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야. 질. 어떻게 그녀는 우리 가문의 상황을 그렇게 정확하게 꿰뚫어 봤을까? 이렇게 매력적이라면 미끼에 독이 들어있다고 해도먹을 수밖에 없어.”
이 말에 경호원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카빙 위즐이나 천산갑보다도 겁이 많지 않으십니까?”
“후후후후후- 상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지. 나는 하루 전까지만 해도 금보다 비싸게 팔리던 향신료가 하루아침에 똥덩어리보다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라고.”
“시집도 가지 않은 숫처녀가 하는 비유가 그게 뭡니까? 이러니 품위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흥. 그따위 시답잖은 전통이나 격식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 버리라지.”
사라는 그렇게 저주를 퍼붓고 난 후에 다시 한번 와인 잔을 들어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귀족들을 비추어 보았다.
겉으로 보면 단순하게 술에 취한 왕따 영애가 자포자기해서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것은 술잔으로 위장하고 있는 비장의 마도구였다.
집음 도청장치.
사라는 이것을 통해서 뱃놀이에서 흘러나오는 비밀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엿듣고 있었다.
[젠장!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혈마법사들의 정기 연락이 갑자기 끊어져 버리다니…]
[습격 예정일은 바로 오늘이 아니었느냐!]
[다시 연락을 시도해. 어서!!]
[제일 중요한 우리의 안전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대체 6척의 함선 중에서 어디에 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서, 설마 은요호 기관에서 우리를 버렸다는 말인가?]
혼란에 빠져서 우왕좌왕하는 귀족들은 모두 은요호 기관과 내통하고 있었던 제국파의 첩자들이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3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던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가 살아있었다고 하더군요.]
[오오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번 회합에 참여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하하하하하! 그것참 왕국 전체의 경사가 아닐 수 없군요. 사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왕국 최고의 명가가 도대체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외국 출신의 계집에게 휘둘리는 것이 정말 꼴사납지 않았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서 천년 가문을 정당한 후계자님에게 돌려드려야 마땅하지요!]
[하하하하하!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제국파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군요!]
[바로 그겁니다. 요즘 들어서 행보가 의뭉스러운 젝플리스 가문도 정신을 차릴 테고. 저기에 눈치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근본이 없는 잡년도 주제를 파악하겠죠.]
[그만하십시오. 그렇게 놀리다가 듣겠습니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하하하하하하!]
굳이 마도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노골적으로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공화국파의 밉살스러운 대화 내용까지 모조리 사라의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틀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겉으로는 아직 중립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억지를 부려서 공화국파의 뱃놀이에 끼어들 수 있었지만, 아무리 신중하게 살펴봐도 딱히 이들의 편에 서야 하는 메리트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공화국파로 위장해서 회합에 참여한내통자들의 대화를 엿들은 덕분에 은요호 기관이 이번 회합을 향해서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여자야. 설마, 이렇게까지 과감한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공화국파의 거의 모든 중요인사가 참여하는 뱃놀이를 습격한다는 계획은 발상은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그녀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외국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터.
하물며 뱃놀이는 오팔 왕국의 절반에 가까운 힘이 집결하는 행사였다.
혈마법사들을 이용해서 어떤 일을 도모하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내통자들의 대화를 지금까지 예의주시하면서 들어본 결과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사실도 알아낼 수가 있었다.
만약에 이번 회합이 무산된다면?
아니, 한 발 더 나가서 북방 3가의 주요 인사가 죽거나 다쳐버리기라도 한다면?
가장 먼저 은요호 기관의 음모를 막지 못한 앵커리지 공화국의 첩보 기관 T-7을 향한 신뢰가 땅에 떨어질 것이며, 자연스럽게 공화국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게다가 북방 3가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자연스럽게 내부 균열을 일으킬 터.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의심 암귀가 싹터버릴 테니 공화국파는 놀라울 정도로 손쉽게 무너져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이 야심 찬 계획에 이변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 징조는지금처럼 갑작스럽게 정기 연락이 끊어져 버려서 혼란에 우왕좌왕하는 내통자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징조로 바깥에서 연락을 받은 베리우스 후작측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부산스러워졌다.
불안에 떨며 하선을 요구하는 내통자들과 그들을 막아서는 경비들.
그리고 유난히 조심스럽게 밀담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횟수가 늘어난 공화국파의 수뇌부들.
태도가 분명하지 않은 자신을 경계해서인지 마도구를 사용해도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수가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돌변해버린 선내의 분위기와 주변인들의 대화 일련의 흐름을 살펴볼 때 대체적인 일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힌트는 갑작스럽게 공화국 파의 귀족들에게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새로운 이름이었다.
‘리한 폰 아슈킬이라?’
3년 전에 종말의 마수를 토벌하다가 사망했다고 알려진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
배가 아프기는 하지만 자신처럼 하루아침(?)에 벼락출세한 부르주아 출신이 아니라, 왕국 최고 명가의 정당한 후계자님이셨으니 귀족들이 칭찬 일색으로 화젯거리로 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 타이밍과 언급되는 횟수였다.
“리한 폰 아슈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질.”
“죄송하지만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아가씨.”
“나도 마찬가지니까 사과할 거 없어.”
사라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다른 모든 가문의 이해관계를 제쳐놓고 젝플릭스 가문과 아슈킬 가문이 정면 대결을 펼친다면, 초반에는 잠시 젝플리스 가문이 기선을 제압하겠지만 결국에는 아슈킬 가문이 승리할 거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잠시 머뭇거린 경호원이 입을 열었다.
“혹시 또 한 명의 삼투장 때문입니까?”
“후후후후. 미안하지만 틀렸어. 사실은 그분은 삼투장이라고 부르기에는 포지션이 너무 애매해. 그냥 세간에서 자기들 편의대로 끼워 넣고있을 뿐이지 엄밀하게 따지면 왕국 소속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불확정한 요소는 가정에서 제외해야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라는 남아있는 와인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하- 생각보다 많이 독하네. 이거.뭐, 인정하기는 싫지만 소위 말하는 천년 가문의 저력이라는 거지.”
“저력이라고요?”
“너 진짜 역사 시간에 졸았지? 칠왕국 회전 말이야. 옛날 옛적에 오팔 왕국의 여섯 방백 연합군이 제니아에서 묵사발이 나버렸던 사건.”
“아-. 대충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단서를 제공하자 경호원이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법사들의 숫자가 다른 방백에 비해서 조금 적기는 하지만 무장들이 왕국 모든 가문을 통틀어서 가장 많고 라인업도 탄탄하지. 그리고 영지 인구까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째서 이 가문이 왕가로 선출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가.”
“그만큼 견제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뭐, 그런 것도 있겠지.”
사라가 턱을 괴면서 취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이 회합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지. 이제 곧 벡워스 근처에 도착하니까 오늘 오전 중으로는 만나볼 수 있을 거야.”
“들어가서쉬시겠습니까?”
“그 전에 먼저 목욕부터 해야겠어. 찬 바람을 너무 오래 맞았더니 몸이 쌀쌀해졌어.”
“시종에게 바로 준비하라고 명령하겠습니다.”
“장미 꽃잎을 한가득 뿌려달라고 말해줘.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들어갈 거야. 그래야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있잖아? 시중을 들어줄 거지?”
“…어째서 그렇게 귀결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경호원은 무릎을 꿇으면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