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뱃놀이(3)
대중의 심리는 굉장히 보수적이다.
테르할 제국과 앵커리지 공화국이라는 두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오팔 왕국의 운명은 사나운폭풍우 속에서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어제와 같은 평화가 오늘도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루크 대장군은 그런 자들을 위한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왕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했던 위대한 영웅.
대륙 유수의 명장들에게 100만의 왕국군보다 두려운 대상으로 칭송받았고 이민족 군대는 그의 그림자조차 두려워해서 국경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모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영웅.
이 위대한 장군이 나라를 지켜주는 한 오팔 왕국은 영원히 평화로울 것이다.
일개 민초부터 공화국파에 합류한 귀족 모두가 이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현실은 잔혹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막을 내렸고 모든 것들이 흘러간 옛 노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늙은 노인이 60년 전부터 군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있다는 사실도, 사흘에 한 번씩 지병의 발작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도, 지독한 허리통증에 시달려서 하루종일 일어서지못하는 날이 비일비재한 노약자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수많은 전쟁을 헤쳐오면서 얻은 영광의 상처는 그의 몸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렸고, 간의 절반을 외과 수술로 잘라냈으며 신체 장기의 3분의 1이 기능을 잃어버렸다.
은퇴해도 이미 예전에 은퇴해서 안락한 노후 생활을 보내야 마땅했지만, 대중의 이기심과 국가의 부름, 의무라는 것들이 그를 다시 이렇게 억지로 무대의 중심에 불러세우고 있었다.
사라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노인 학대라고 생각해. 잔인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물론, 말씀하신 대로 루크님은 무장으로 싸울 상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이 하는 역할은 그것만이 아니잖습니까? 원래 저분은 뛰어난 지휘력과 용병술로 명성을…”
“설마, 용병술이라는 게 그 100년도 더 된 낡고 고리타분한 수법을 말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질. 사관학교는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저분이 활약했던 시대의 전략과 전술들은 모두 교과서에 실려 있어. 그마저도 시니어들이 아니라 주니어들이 연구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교본이라고. 아니면 뭐야. 학창시절에 졸았던 거야?”
“물론, 아닙니다. 아가씨.”
질이 손사래를 치면서 대답했다.
“속임수가 드러난 마술사는 무대 밖으로 퇴장해야지. 안타깝지만 우리 대장군님이 그래. 저분에게 새로운 전략과 전술에 익숙해지라는 것은 소 귀에 경을 읽는 거라고.”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죠.”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전쟁이 내 전공 분야가 아니니까 말이야.”
사라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가 단언한 것처럼 크레이그 가문은 전쟁에는 소질이 없었다.
군사력만 놓고 보면 여섯 방백 중에서 최약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
그마저도 지지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세력권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내부 단속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는 넘치는 돈으로 다른 가문에 자금과 후방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 왕권 다툼에서는 어느 진영의 편을 들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냐면 나머지 두 방백의 군사력이 공화국파를 모두 합친 것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오팔 왕국 전통의 강자인 천년 가문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제쳐놓더라도 왕국 남서부를 지배하는 젝플리스 가문을 먼저 살펴보자면, 현존하는 여섯 방백 중에서도 제일 승승장구하면서 잘 나가고 있었다.
현재 가문의 수장은 테오.
본인 스스로 왕국 삼투자 중에 하나로서 루크와 똑같은 s급의 무장이었다.
반면에 나이는 앞길이 창창한 48세.
개인의 전투력만 봐도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나가 버린 그하고 다르게 물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고, 야전 사령관으로서도 그 실력이 절정에 도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데피리스 교단의 주재로 테세트 평야의 영토 분할이 이루어졌을 때. 새로 획득한 식민지에 두 명의 총독이 파견되었지. 그분들이 누군지 알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아도프 마리오 백작님과 테오 젝플리스 백작님이시죠.”
“맞아. 그리고 알다시피 테세트 평야는 말보다 폭력이 앞서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무법천지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 교황이 내키는 대로 영토를 수십, 수백 개로 쪼개서 대륙의 모든 국가에 나눠 줘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싸움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흔히 세계대전의 축소판이었다고 하더군요.”
“처음 1년 동안에는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지. 듣자 하니 첫해 동안에만 무려 89개의 식민지가 멸망했다고 하더라. 이게 정말로 세계대전이었다면 그만한 숫자의 나라들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치열하게 대리전쟁을 펼쳤기 때문에 지난 3년 동안에 세계가 평화로웠다고 들었습니다만…”
질의 말에 사라는 들고 있던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모두 식민지 경쟁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우리 오팔 왕국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첫해는 왕실뿐만이 아니라 모든 방백이 지원군을 보냈지.”
“공동출자로 식민지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가 나눠 가졌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고생은 물론, 일선에 계셨던 두 총독분께서 감수하셨지만 말입니다.”
“후후후후. 하지만 그게 무조건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야. 왕국 전체에서 팍팍 밀어주니까 돈과 인력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각국의 군대와 싸워보면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니까 말이야.”
이 말에 경호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지난 3년 동안에 테오님의 활약과 명성이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던 테세트 평야의 패권 다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안정 국면에 이르고 있었다.
가장 넓은 식민지를 차지한 세력은 당연히 테르할 제국.
처음부터 외교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기 때문에 처음에 배정받은 영토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입지를 가지고 있었고, 대륙 최강의 기사 쥬란 신의 죽마고우이자 같은 사문인 검성의 제자 킬리안 총독의 활약과 더불어 중앙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까지 합쳐졌기에 당연한 쾌거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2위는 앵커리지 공화국.
외교전에서 밀려서 불리한 여건에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중우 정치의 폐해와 방산 비리까지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뭔지를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여기에 이어서 3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오팔 왕국이었다.
황무지 시절에 테세트 평야를 소유하고 있던 원래 주인이었기 때문에 국경선조차 닿지 못하는 다른 수많은 나라보다 지리적인 우위를 선점하고 있기는했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른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이만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은 두 총독의 성과를 비교해 봤을 때 더 분명해졌다.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도프 백작의 군대는 테세트 평야에서 고전을 면하지 못했어. 오히려 연전연패하면서 원래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마저 빼앗겨버리는바람에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지. 다른 방백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버린것은 덤이었고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지금 회합에서도 별로 표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질의 말처럼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는 아도프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팍 쓰면서 연거푸 퍼마시고 있었다.
사라는 그런 그를 자신의 술잔에 담그듯이 비춰 보았다.
“후후후후. 그것 보라니까? 명가 출신이라는 게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게 아니야. 아무리 태중양생술을 사용해서 태생부터 차이를 두려고 해봤자 진가는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법이지.”
아도프 백작이 그렇게 고배를 마시는 동안에 테오는 다른 국가의 정예군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영토에 2배가 넘는 거대한 식민지 영토를 확보하여 대륙 전체에 위명을 떨쳤다.
오죽하면 오팔 왕국 최강의 군대는 베리우스 후작이 이끄는 북방군이 아니라 그가 이끄는 식민지 군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이런 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진정한 저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따로 있었다.
“그렇다면 아가씨께서 보시기에 젝플리스 가문과 아슈킬 가문 중에서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보십니까?”
“후후후후후후후후후-”
지금까지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난간에 양팔을 기대면서 아주 긴. 새하얀 입김을 어둠 속으로 뱉어내었다.
“내가 그래서 지금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