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뱃놀이(2)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6척의 전함을 도개교로 연결한 선상에서는 회합의 이름에 걸맞은 화려한 뱃놀이가 한창이었다.
대외 노출을 최소화하려고 사일런스와 미스트 마법으로 선단의 존재감 자체를 지우고 있었지만 그런 경호 임무하고는 별개로 귀족들은 태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법사들이 하늘로 쏘아 올리는 각양각색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꽃잎들이 터져 나오면서 하늘하늘 흘러내렸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 소리에 맞춰서 칼센 사막 출신의 무희들이 인형춤을 췄다.
하하하하하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그녀는 붉은색 와인이 찰랑거리는 잔을 들어서 삼삼오오 모여있는 귀족들을 하나씩 그 속에 담가 보았다.
“질. 이 파티는 말이야. 정말로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어. 공화국 파벌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기득권 세력이 주류를 있지. 이러니까 우리 가문이 여기에 설 자리가 없는 거야.”
그녀의 이름은 사라 크레이그.
오팔 왕국의 여섯 방백 중 하나로 왕국의 남동부를 지배하는 대제후였지만 가문으로서의 역사는 지극히 짧았다.
부르주아 출신이었던 그녀의 할아버지가 우연히 델링거 왕실에 공적을 세워서 남작의지위를 하사받은 것을 시작으로, 아버지가 탁월한 정무 감각과 외교력을 발휘해서 주변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급성장을 이룩해 냈다.
그리고 이런 밑천을 바탕으로 그녀는 선진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중상주의에 힘을 쏟았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3대에 걸쳐서 이어진 100년의 노력.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왕국 역사에 유례가 없는 출세 가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크레이그 가문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오히려 악의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근본도 없는 미천한 출신이 지나치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군.]
[명예를 모르는 비열한 자들이니까 성공한 거야. 사기나 치고 다니는 더러운 장사꾼 같으니라고.]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천박한 여자야. 품위를 모르는 짐승하고는 대화를 나눌 수 없지.]
오로지 앞만 보면서 달려오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반 대중들에게는 질투와 시샘이 대상이 되어있었고 자신들에게 굴복한 세경가들까지 멸시와 조롱의 시선을 보냈다.
‘어째서?’
부당하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복받쳐 올랐지만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원인을 분석하던 도중에 사라가 깨달은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가문의 성공을 받아들이기에는 이 나라가 너무 낡고 오래되었구나.’
보통 천민 출신이 권력을 잡고 왕이 된다는 서사는 나라의 틀이 완전히 새롭게 짜이는 혼란의 시기에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나라는 너무 오랫동안 권력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공을 위한 진입장벽이 높아도 너무 지나치게 높아져버렸다는 소리다.
아슈킬 가문처럼 천년의 영화를 누려온 가문은 없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귀족들에게 크레이그 가문의 100년이란, 걸음마조차 제대로 떼지 못한 갓난아기가 위세를 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단순히 귀족으로서도 신생아 취급을 받을 정도였는데 왕국 최고의 대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녀의 가문은 완전히 고립되어버리고 말았다.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세경가들조차 뒤에서는 전부 호박씨를 까고 있기에 누구를 믿고, 말아야 할지. 어떤 꿍꿍이와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이번 회합에 대귀족의 신분으로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물론, 이번에는 더욱이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무임승차를 해버렸다는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 크레이그였다.
철저한 이익과 합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상인.
세상의 편견과 차별이 아무리 가문을 핍박해 온다고 해도 멈춰서지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도 않을 것이었다.
“대체 왜…”
“알고 있어. 무시당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이런 회합에 참여했냐는 거지?”
“제 말을 끊고 가로채지 마십시오.”
“후후후후.”
사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경호원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코를 톡하고 찍어버렸다.
“앞으로 다가올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살아남으려면 판세 분석을 최대한 정확하게 해야 하니까. 아무리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만한 자들의 모임이라도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최대한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봐야지. ”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아가씨께서 직접 목격하신 공화국파의 실상이 말입니다.”
“글쎄…”
괜스레 말꼬리를 늘리면서 짓궂게 뜸을 들였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처음부터 단순한 이야기다.
오팔 왕국에 얼마나 많은 지방 영주들이 있다고 해도 중요한것은 결국 대제후들이 누구를 지지하냐는 것이었다.
알렌 왕세자와 앤서니 왕녀.
계승 서열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지성과 실력까지 무엇 하나 비교 대상이 아니었지만, 앤서니 왕녀에게는 사라로서는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권력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
[정치?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여왕이 되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귀찮은 예의범절 따질 필요도 없고 정략결혼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데 정말 최고 아니야?]
누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앤서니 왕녀의 허파에 이런 바람을 불어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한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라는 이 소리를 듣고 홀딱 빠져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매력적인 머저리를 봤나?’
흔히 훌륭한 군주의 첫 번째 덕목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지덕체까지 보유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일반 대중들이 바라는 이상일 뿐이지, 신하들이 원하는 군주의 상은 조금 달랐다.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싶은 충신이거나, 아첨으로 권세를 누리고 싶은 간신이거나 그들이 바라는 군주의 최고 덕목은 다음과 같았다.
힘세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머저리.
충신이 바라는 조건을 하나 덧붙이자면 [사고 안 치고]가 추가되겠지만 요점은 입맛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앤서니 왕녀는 사라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택이었고 알렌 왕세자는 최악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가있었다.
현재 공화국 파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대제후는 셋.
로체스, 마리오, 블랙우드 가문으로 간단하게 오팔 왕국의 북방 3가로 분류하고 있다.
하나같이 5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낡아빠진 훈구 세력들이라는 소리기도 했다.
왕세자 본인이 소통이 되지 않는 고집불통은 아니었지만 이미 정통 기득권 세력들에게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신진 세력인 자신의 가문이 개입할 요소를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매력 없는 왕권 후보자.
만약에 그가 차기 국왕이 된다면 사라 크레이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없는 사람처럼 무시를 해버리다니 말이야.
아군을 늘리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러면 어째서 떠나시지 않은 겁니까? 저쪽은 언제든지 배에서 내려도 상관하지 않았을 텐데요.”
“한 번 맞춰볼래?”
질의 말에 피식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앤서니 왕녀가 매력적이라고 해도 전쟁에서 지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까?”
“정답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뭐라고 생각해?”
“혹시 저자들 때문입니까?”
경호원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공화국파의 최대 군벌들이 밀집해 있었다.
왕국 최정예 군대인 북방군을 통솔하는 베리우스 후작과 블랙 이글 기사단의 단장 칼센 경, 그 외에도 기라성같은 무장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오팔 왕국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루크 대장군이었다.
현재 나이 158세.
이미 100년 전부터 대장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직 최고령 사령관.
장수하기로 유명한 이종족까지 손에 꼽는다면 더 나이가 많은 자들도 군문에서 찾아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리 무공의 화후가 높아진다고 해도 세월에 무력한 인간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그 나이에 현역으로 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륙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왕국에서도 셋밖에 없다는 S급 무장에 포함되어 있어서 삼투장으로 불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
“확실히 루크 대장군의 위세가 대단하기는 했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렸거든. 덩치도 덩치지만 저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아. 살아있다고 해도 저렇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근육질 몸매를 유지할 자신도없고 말이야. 정말 대단하지 않아?”
“노인치고는 말이죠.”
“바로 그거야.”
사라가 정확한 포인트를 짚었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려 보였다.
무공의 상승 경지로 분류되는 반로환동은 보통 A급에서 A+급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인생에 제 2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시기는 보통 60세에서 80세 사이.
하지만 100세를 넘어가면 또다시 급격하게 나이를 먹고 노화가 진행되는데, 아주 드물게 인간을 초월해서 더 오래 전성기를누리는 경우는 있어도 세월의 화살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불요불굴의 신화라느니, 왕국 최강의 무장이라느니. 솔직히 말해서 모두 다 옛날이야기야. 루크 대장군이 마지막으로 군대를 지휘한 게 언제였는지 알아? 벌써 10년 전이라고.”
“그래도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세 살배기가 지휘했어도 이겼을 전쟁을 말이지. 그마저도 저 노인네가 중간에 앓아눕는 바람에 군대 전체의 발목을 잡았어. 아무리 쉬쉬한다고 해도 이 사라 크레이그를 속일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