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트로이 목마(10)
그렇게 말하면서 매혹적인 자세로 손바닥 키스를 날려왔지만 그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자, 잠깐! 제발 목숨은 살려 줘. 이렇게 빌게! 그, 그래. 나에게는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있잖아? 원하는 정보가 있다면 뭐든지…커헉!”
콰직!
두 손이 닳도록 빌어댔지만 말을 마치기 전에 카트리나의 팔이 그의 가슴을 뚫고서 반대편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어어억…”
“누가 복수는 허무하다고 하던데 말이죠.”
펄떡! 펄떡…
마지막 혈액을 뿜어내면서 멈춰가는 심장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적어도 당신의 피는 굉장히 달콤하군요.”
쿵!
앞으로 고꾸라져서 초점이 사라져가는투스트로의 눈동자에 손가락에 달라붙은 피를 핥아올리는 카트리나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맺혔다.
****
한편.
군대를 동원한 휴크는 불야성의 벨벳 홀에 임시 사령부를 마련하고 돌입조를 지원하고 있었다.
“탈출로는 모두 봉쇄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지하수도는 어떻게 되었느냐? 적들이 베르디 강으로 빠져나올지도 모른다고 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공사 관계자들에게 지도를 입수해서 수색에 착수했습니다. 군견과 마법사, 그리고 백여 명의 병사들을 동원했으니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통신 방해로 아군 사이에 실시간으로 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서구와 발이 빠른 파발들을 이용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유기적으로 대처.
비록 팔콘 전사들이나 용병들처럼 눈에 띄는 화려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서포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갔다.
[불법 시설 이용자들을 모두 체포해서 감옥으로 연행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던 빅터 래빗과 6명의 마약 딜러들을 확보했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가택 수색과 재산 압류도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탈출을 시도하려고 하던 혈마법사들을 체포했습니다. 제압 과정에서 7명을 사살. 나머지 스무 명은 저항하지 않고 투항했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있었던 12명의 시민과 40여 명의 이종족 노예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합성 생물을 발견했습니다만…동행하고 있던 사제들과 마법사의 소견에 따르면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모든 보고가 긍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 제압 작전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대승리였다.
“후계자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군. 설마, 이렇게 거대한 조직을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제압해 버리시다니…팔콘 전사도, 팔콘 전사들이지만 우리 같은 약소 세력으로는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는 역량이야.”
“너무 그렇게 비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군. 그래도 이만한 공적이라면 공화국 파벌의 회합에서도 절대로 가벼이 여겨지지는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님과도 이렇게교우를 맺으셨으니 장차 영지의 안정에도 커다란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변에 있는 측근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떨떠름한 표정을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희들의 말이 맞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멜더릭에게로 향했다.
“너는 왜 그렇게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이냐?”
“면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주군. 소관의 섣부른 지레짐작으로 그러한 수모를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황송할진대, 관할 구역에서 이런 끔찍한 음모가 준동하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정말로 그러하구나.”
쿵!
이 말을 듣고서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소관을 믿고 벡워스의 치안을 위임해주신 주군에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부로 관직을 반납할 테니 어떠한 엄벌이라도 내려주시옵소서!!”
“됐다. 처음에는 나도 너에게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손해를 입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하지만…”
“그리고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후계자님께서 너의 처분에 선처를 요구하셨다.”
“그, 그분께서 말입니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결과적으로 신중하지 못해서 헛다리를 짚어버리기는 했지만 그 수사력이나 과감한 행동력, 충성심은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말씀하셨다. 너희 두 사람 모두 말이야.”
“두 사람이라고 말씀하심은…”
“그래. 너뿐만 아니라 지젤이 저지른 실수도 모두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후계자님의 요구로 우리 영지를 대표하는 연락관으로서 그분을 섬기기로 했다. 비서 겸, 외교 대사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영전했다고 봐도 되겠지.”
“그게 정말입니까?”
멜더릭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깨물어서 아픈 손가락처럼 신뢰하는 부하가 자신의 서투른 행동에 휘말려서 곤란한 처지에 놓여버릴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처분은커녕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한다는 말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그.
“너도 참 속이 없구나. 한때는 부하였던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직급으로 올라간다는데 그렇게 좋아하다니 말이야.”
“채,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딱히 거슬려서 하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덕분에 네게 사심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후계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일개 경비대장으로 썩히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야…”
뒷말은 작게 중얼거리는 바람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마지막 파발이 헐레벌떡 급하게 뛰어왔다.
“알려드립니다! 제압 작전이 한 사람의 피해도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후계자님께서 지금 귀환하고 계십니다! 후계자님께서 지금 귀환하고 계십니다!!”
오오오오오!!
짝짝짝짝짝짝!
“오늘 밤은 벡워스의 공관에서 성대하게 축하 파티를 열어드려야겠군. 아니, 이럴 게 아니지. 다들 무엇 하느냐?! 어서 후계자님과 아스트라세 자작 일가를 마중하러 가자. 모두 서둘러!!”
****
“파티는 너희들끼리 즐겨라.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남아있다.”
휴크의 정중한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린 리한은 아토스의 저택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상황을 보고 받았다.
“총 207명의 혈마법사 중에서 넥타르의 수장인 투스트로를 비롯한 89명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투항했지만 대부분 4서클 이하로 간부급은 모조리 옥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지시하신 대로 박카이들은 파괴하지 않고 저수조에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합성 마수들은 모두 폐기해 버렸고, 실험체 중에서 의식이 남아있는 자들은 일단 신전으로 이송했습니다만 원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아마도…”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던 지젤이 말끝을 흐렸다.
“뭐지?”
“절차를 밟아서 자발적인 안락사 조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처사로군.”
자발적인 안락사라는 것은 좋게 포장해서 하는 말이지 실제로는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분해버리겠다는 소리였다.
“저도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데피리스 교단의 방침이 워낙에 완고해서 구제조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능하면 인도적인 조치를 요구하도록 해라. 넥타르를 토벌한 것은 우리니까 그 정도 의사는 전달할 수 있지 않느냐?”
“네, 물론입니다. 바로조치를 하겠습니다.”
이 말에 지젤은 물론이고 곁에서 듣고 있던 아스트라세 일가의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차피 구할 수 없는 상대에게 체면치레나 하겠다는 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성이 보이는 부분마다 일희일비하는 모습.
‘사실은 마스터 코어를 사용하면 모두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오히려 지켜보는 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힘을 사용하기는 어려워지는군. 슬슬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야 하겠어.’
“다음.”
리한의 말에 지젤이 물러나면서 카트리나가 앞으로 나섰다.
“명령하신 대로 투스트로의 비밀 보관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어요,주인님. 그곳에서 넥타르가 은요호 기관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다는 밀서와 문서, 회계 기록까지 발견할수 있었습니다.”
“증거를 그렇게 산더미처럼 남겨놓다니 경솔한 녀석들이군.”
“오히려 치밀하다고 봐야 하겠죠. 자신들의 처지에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으려면 상급 기관의 약점 정도는 쥐고 있어야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덕분에 우리가 횡재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죠.”
혈마법사는 대륙의 모든 마법사에게 공공의 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간이 이 세계를 다스릴 영장이라고 믿고 있는 데피리스 교단도 마찬가지.
인체실험과 제물의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혈마법사를 좋아하는 세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제국이 뒤에서 몰래 이런 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일어날 파장이 절대로 가볍지 않을 터였다.
“베리우스 후작에게 넘겨주면 좋아서 춤을 추겠군. 제국파를 단숨에 궁지로 몰아세울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쥐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너무 쉽게 넘겨주는 것 같아서 아쉽군요. 차라리 양쪽 세력에게 경매를 붙여서 비싸게 입찰하는 상대에게 팔아넘기는 것이 어떠할까요?”
“후후후. 조그마한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두 마리를 그렇게 가지고 놀았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해. 어차피 이 사실이 세상에 공표된다고 해도 제국이 골치를 썩일 기간은 기껏해야 2~3달이야. 그 후로는 모두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제국은 절대로 그 수모를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복수하려고 할 텐데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은 세상에서 오직 앵커리지 공화국밖에 없지.”
“과연. 거래할 대상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말씀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