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트로이 목마(2)
“뱃놀이라고 하심은…?”
“도대체 후계자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루돌프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어봤지만 남작이 다급한 표정으로 정색하면서 새치기를 했다.
“그것도 폭스 하운드의 활약으로 알게 되었지.”
‘사실은 임페리얼 가드가 멜더릭과 지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어서 알게 된 단서였지만 말이지.’
“하지만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한 사항이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흥! 뻔뻔하게 그런 대대적인 행사를 벌여놓고 천하의 은요호 기관이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이미 거기에 참석하고 있는 귀족 중에서도 상당수가 내통하고 있다는 말이야.”
“그럴 수가…”
루시의 말에 휴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도련님. 뱃놀이가 대체 무엇입니까? 처음 듣는 생소한 내용이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군요.”
“좋아, 설명해주지.”
리한이 그렇게 대답하고 대체적인 개요를 알러주었다.
현재 오팔 왕국의 정치권은 알렌 왕세자를 차기 국왕으로 지지하는 공화국파와 앤서니 왕녀를 지지하는 제국파로 나뉘어져서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직은 내전으로까지 발전할 양상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에 불과했기 때문에, 양 파벌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
베리우스 후작은 그런 왕세자의 제 1측근으로서 현 공화국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장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영지 자체의 규모는 방백들에 비해서 작고 보잘것이 없지만, 왕국 최강을 자랑하는 북방군의 총사령관이며 처가가 앵커리지 공화국에서 상당한 정치 영향력을 발휘하는 명가였기 때문에 외세의 지원까지 든든하게 업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
그런 그가 오팔 왕국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베르디 강을 국경의 끝에서부터 선단을 이끌고 내려오는 작전이 뱃놀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런 행동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후후후. 베르디 강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일이다. 예로부터 이강은 지방 영주들이 징수선을 올려보내는 것으로 왕실에 세금을 바쳐서 충성을 재확인하는 장소로 이용되어왔지. 지금 후작 각하께서는 지방의 영주들에게 같은 것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휴크.”
“그, 그것이…”
“도련님께서 어째서 이 녀석을 자꾸 걸고넘어지시는지도모르겠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 녀석의 조그마한 남작령은 제니아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말이다. 속으로는 아무리 알렌 왕세자를 지지한다고 해도 우리 가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어째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도대체 어디에서 용기를 얻어서 말이야.”
“설마, 이 새끼가뭔가 발칙한 짓을 꾸미고 있었다는…”
“아, 아닙니다! 후계자님. 정말로 오해십니다!”
루돌프가 째려보자 정색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글쎄? 정말로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이번 회합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한다면 100%확신하는 것도 이상한데 말이야.”
“그, 그건…”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베리우스 후작 각하께서 이렇게 위험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회합을 어째서 강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편 가르기를 하기 쉬운 중앙 정치권만이 아니라 지방 영주들의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려고…아?!”
“바로 그거다.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있으면 보잘것없는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군소세력들을 끌어모아서 하나로 뭉치면 제니아를 위협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쿵!
“감히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니!!”
분노한 그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자 어째서인지 휴크의 몸만 들썩거리면서 진동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감히 제니아를 도모하겠다는 그런 발칙한 상상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단지, 이번 기회에 하루아침에 멸망해버릴 수도 있는 파리 목숨만큼은 벗어나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안다, 알아. 설마 내가 약자의 서러움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선의 전략을 도모하는 것은 세상살이에 있어서 당연한 이치지.”
“후계자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 입장이고.”
“!!”
“감히 우리 가문의 앞마당에서 그따위 역적모의를 계획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멸망하고 싶지 않으면 이제부터 내 산하세력으로 들어와서 충성을 맹세해라. 애완견처럼 열심히 재롱을 부리면 목숨과 가문 정도는 부지하게 해주지.”
잠시 기뻐하면서 희망에 부풀어 올랐던 휴크의 멘탈이 바사삭하고 부서져 내렸다.
“어, 어떻게 그런…”
“싫으면 여기에서 죽던가.”
“아니, 아닙니다! 후계자님. 말씀하시는 대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크흐흐흑.”
관대(?)한 처사에 감격했는지 부르르 떨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려오는 것을 보면서 리한은 흡족한 표정으로 홍차를 음미했다.
루돌프는 그 식견과 수완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입맛이 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던 과거의 도련님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구나.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평소에는 세상 착하고 아둔한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금 되새겨보면 간간이 드러나는 송곳같은 총명함을 가지고 계셨어. 그것이 험난한 세파를 거쳐오면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라면…휴우. 군주의 재목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일가 전체가 마찬가지였는지 자녀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툭툭툭!
리한은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두드려대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무슨 생각에 빠져서 다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냐?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모두 다 집중해라.”
“아,네! 죄송합니다. 도련님.”
“어쨌든 뱃놀이를 성대하게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공화국파의 세력을 확실하게 강화할 수 있다는 소리지. 하지만 지금처럼 제국파에게 노려질 가능성이 있어서 그만큼 경호 활동과 기밀 유지에 신경을 썼을 테지만 후자는 이미 틀려먹었다는 소리지.”
“저기, 외람되오나 후계자님 아니, 주군께서는 어느 파벌을 지지하시는 겁니까?”
후계자라고 부르다가 째려보는 표정에 다급하게 호칭을 바꾼 휴크가 눈치를 보면서 질문해 왔다.
리한은 순간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 어리석은 인간이 품고 있는 희망을 바닥없는 늪 속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처박아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나 또한 공화국파를 지지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양국 모두 시커먼 속내를 가지고 있는 외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현재 정세에서 제국파가 득세해버리면 이 나라는 끝장이야. 당연히 차악을 선택해야 하지.”
“저도 동감합니다, 도련님. 돌로레스 그 빌어먹을 년은 그렇게 당연한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희희낙락 제국의 대외 원조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만…그것이 아슈킬 가문을 좀먹는 독이 든 사과라는 사실은 제정신이 박혀있는 가신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옳은 선택이십니다, 후계자님! 두 분 모두 탁월한 식견이십니다!”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예상대로 뛸 듯이 기뻐하면 반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뱃놀이에 참석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처지라고 해봤자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제니아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 베리우스 후작 각하라면 틀림없이 따듯하게 맞이해주실 겁니다. 후계자님의 정당한 지위를 찾아드리기 위해서라면 군대라도 흔쾌히 내어드릴 것이…”
“하하하하! 정말로 기가 차는구나 휴크. 그렇게 외세를 끌어들여서 제니아를 내전에 휩싸이게 하라는 소리냐? 왜? 우리 가문이약해지는 틈을 노려서 영토확장이라도 도모해보시려고? 아니면 공화국파에 막대한 빚을 져서 내정간섭을 벗어나지 못하는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라는 것이냐?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정도껏 하라는 말이다!이 자식아!!”
루돌프가 적극적으로 편을 들면서 외쳤다.
“저, 저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오라…”
“안다, 알아. 지금 내 처지에서 찬밥 더운밥을 가릴 신세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쉽사리 외세를 끌어들일 수는 없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과 제니아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일이야.”
이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실언을 해버렸군요, 용서해 주십시오. 후계자님.”
“후후후후. 그러니까 대등한 입장에서 떳떳하게 거래를 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지.”
“…네?”
“아까 했던 말을 잊어버렸느냐? 이 벡워스의 지하에는 후작 각하께서 주최하시는 뱃놀이를 박살 내버리려고 하는 악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이미 참석하고 있는 배신자들의 명단까지 확보할 수만 있다면 당당하게 일대일 교섭을 신청할 수 있는 거래 재료까지 만들어지는 셈이지.”
“화, 확실히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금 보유하고 있는 전력으로는 공략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숫자의 혈마법사와 합성 생물이라면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승리한다고 해도 피해가 막심할 텐데.”
루돌프가 물어보자 리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저돌맹진을 자랑하는 아스트라세 일가의 수장이 그렇게 소심한 의견을 펼쳐오다니 재밌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럴 줄 알고서 야월 녀석들의 시체를 이렇게 차곡차곡 모아놓은 것이니까.”
“야월의 시체가 무슨 역할을…서, 설마??”
짝!
모두가 경악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손뼉을 쳐서 주변을 환기한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다들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냐? 어서 녀석들의 복장으로 갈아입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