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재회(6)
형장.
사형집행관이 부녀의 손을 잘라내기 위해서 검을 치켜들기 직전에 소년이 새하얀 수의를 차려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처벌을 진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발 누군가가 도와달라고 빌고, 또 빌었던 이리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리한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와서 털썩하고 주저앉아버리더니 붕대를 감지 않은 왼쪽 손으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것이냐. 리한?]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마르텔 대모가 물었지만 소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입을열었다.
[가신과 함께 이번 사건을 일으킨 책임을 지려고 왔습니다. 대모님.]
[책임이라니! 대체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래야 한다는 말이냐!]
[측근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무능함이 가장 큰 죄이며,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도 말리지 못했던 죄, 동참한 것 또한 죄, 귀중한 인력과 자원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희생당하게 만들었으니 이 또한 제니아를 이끌어가야 하는 후계자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실태옵니다. 노블레스 오블레주의 원칙에 따라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수족들의 손만을 잘라내고 물러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원칙을 지켜서 목숨으로 속죄하려고 하니, 대소신료들은 제니아 만민의 노여움을 가라앉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외치고는 단도를 들어서 정말로 자신의 목을 그어버리고말았다.
덕분에 대전에서는 엄청난 소동이 일어나버리고 말았고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달려와서 곧바로 목숨을 구해내기는 했지만, 이대로 루돌프 부녀의 처벌을 강행했다가는 후계자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이유로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우리 일가에 내려진 처분은 피해 금액을 변상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무인에게 생명이나 다름이 없는 딸과 내 손이 지켜진 것은 모두 도련님 덕분이었다는 것이야.”
꿀꺽.
“생각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는 사연이로군요.”
이야기를 모두 경청한 멜더릭이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터무니없지. 하하하. 세상이 아무리 넓고 괴짜 같은 사람이 많다고 해도 도련님 같은 분은 없으실 것이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꿈을 꾼 게 아닐까하고 얼떨떨해져 버리니까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단한 기지가 아니십니까? 그런 상황에서 자작님과 따님을 구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고육지계를 떠올려 내신 셈이니…”
“멍청한 녀석-------!!”
“???!!”
콰아아아아아앙!!
루돌프가 내지른 함성에 순식간에 봉두난발이 되어버린 멜더릭의 귀가 먹먹해졌다.
“계책이라고? 너는 이게 냉정하게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서 나올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부녀의 손목은 그때 잘려나갔어야 해! 그것이 당연한 처분이었고 감히 종가를 원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막아버리시는 바람에 도련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피해를 보고 앙심을 품은 가신들이 모조리 등을 돌려버렸다는 말이다! 도대체 세상 어디에 졸병하나를 지키려고 나머지 말과 자신마저 희생해버리는 멍청한 왕장이 있다는 말이냐!!”
마치 폭발하는 활화산처럼 속에 들어있는 말들을 모조리 쏟아낸 그는 마지막으로 숨을크게 들이마시고는 벡워스 전체에 울려퍼질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래서 우리 일가가 그분을 미치도록 사모한다는 말이다----!!!”
쿠오오오오오-
사자후를연상하게 하는 엄청난 고성에 경비대 병사들은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지만, 팔콘 전사들은 익숙하다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까지 띄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이리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불편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크흠! 말씀하시는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아버님. 우리 일가라는 표현은 자제를 해주십시오. 저도 그 일에 대해서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딱히 도련님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지는…”
“뭐어어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딸내미는.”
“하아아아아- 진짜로 츤데레도 작작 좀 해주십시오, 누님. 요즘 시대의 남자들은 초식 계열이 많아서, 그렇게 튕겨대셨다가는 정말로 노처녀로 독수공방하다가 가버리실지도 모릅니다.”
“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랜달. 요즘 남자들이라니 나는 딱히 다른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던지…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횡설수설하다가 말실수를 해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을 내버려 둘 부자가 아니었다.
“그래, 그렇지? 우리 딸은 일편단심 도련님바라기니까 말이야. 다른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상관없겠지. 기억하고 있느냐? 아들아. 그 사건 이후로 너의 누이가사춘기가 찾아와버려서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악!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아버님??”
“아, 그때라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화장을 해보겠다고 어머니를 어설프게 따라 했다가 여장남자라는 소리를 들었죠. 하지만 아버님도 그건 모르실 겁니다. 어느 날, 누님께서 눈가리개를 구입한 적이 있으셨는데…읍읍??”
“호오? 그런 일이??”
“닥쳐! 죽고 싶지 않으면 닥치란 말이야!!”
사랑하는 가족의 흑역사를 모조리 알고 있는 부자의 무자비한 연합공격에 이리나는 빙면설화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처참하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에피소드를 쏟아내는 가운데서도 그들이 암묵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심각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리한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살아있을 가능성의 희박하다는 보고에 종가는 물론이고 아스트라세 일가까지 남다른 충격에 휩싸였지만, 그중에서도 이리나가가장 위태로운 행보를 보여주었다.
수색대를 조직한다는 말에 가장 먼저 자원한 그녀.
약 3개월 동안 테세트 평야를 그야말로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으며 제대로 자거나,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수색에 매진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까무러쳐서 주변에서 억지로 뜯어말렸을 정도였다.
결국에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실종 처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반년 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간 이리나.
혹시라도 그르친 선택을 해버리지는 않을까 우려해서 루돌프도 함께 참여했고, 예상대로 심마에 사로잡혀서 광기 어린 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대어 몇 번이나 주화입마의 위험에 노출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 기간에 벽을 깨고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것.
미칠 듯이 수련에 매진한 덕분인지 루돌프와 거의 동등한 경지에 도달해버리고 말았지만 그는 딸의 성장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무공 자체가 변질해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 가문이 대대로 수련해온 설영빙천공이라고 할 수가 없다. 차라리 혈血천공이라고 하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살기가 넘치는 소름 끼치는 검기라니…’
다행히 벽을 깨고서 한풀이를 마쳤는지 상태가 안정되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했던 표정이 그 날을 경계로 아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북풍한설 같던 차가움이 녹아내린 것이 불과 얼마 전.
리한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그리고 아스트라세 일가는 이 순간에 확실하게 깨달음을 얻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그녀의 검기에 화사하게 꽃을 피워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하하하! 조금만 있으면 도련님을 다시 뵐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말로 좀이 쑤시는구나. 과연 어떤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실지 모르겠어. 그동안 객지에서 온갖 고생에 시달리셨을 텐데 몸이라도 상하지 않으셨다면 좋겠다마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세상 유약해 보이면서도 누구보다 심지가 단단하신 분이 아닙니까? 틀림없이 예전처럼 태양 같은 밝고 따듯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실 겁니다.”
“흥!”
너무 놀려대는 바람에 살짝 삐져버린 이리나는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지만, 그녀가 누구보다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발그레한 홍조와 조용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로 확인할 수가있었다.
하지만 멜더릭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적어도 남작님과 함께 마주했던 후계자님은 절대로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는 사이에 일행들은 마침내 아토스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이이이익!
기다렸다는 듯이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남자.
“어서 오십시오. 아스트라세 자작님. 후계자님의 명령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리스라고 합니다.”
“흠, 차림새로 보니까 간병인으로 보이는데. 집안에 누군가 아픈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혹시 도련님께서 어딘가 편찮으신 것은…”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주인님하고의 계약이 아직 끝나서 허드렛일을 거들고 있을 뿐이니까요. 후계자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무탈하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분께서는 장미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으십니다.”
“그래, 알았다. 너희들은 전부 여기에서 대기해라!”
“존명!”
팔콘 전사들을 입구에 내버려 둔 아스트라세 일가는 호리스의 안내를 따라서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마침내 고대하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들떠 오르는 마음을 갖추지 못하는 일행들.
하지만 장미 울타리를 맞이해서 그리워 마다하지 않았던 님과의 상봉은 그들이 상상하던 낭만적인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아니, 충격적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