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7화 〉재회(5) (77/429)



〈 77화 〉재회(5)

그렇게 얼마 동안을 나아가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작님,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사실 저를 여기로 보낸 사람은 후계자님이십니다.”


“리한 도련님께서 말이냐?”

“네, 남작령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어서 달려가서 진정시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솔직히 제시간에 맞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놀라우신 통찰력 덕분에 늦지 않을수가 있었습니다.”

 말에 루돌프는 유쾌하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었다.

“으하하하하하하! 놀라운 통찰력이라니…별 쓸데없는 아부를 하는구나. 미안하지만 우리 도련님께서는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주려고 해도 그렇게 영특하시지는 않다.”

“네? 하지만 제가 봤던 모습은…”

“흥! 네놈이 도련님을 얼마나 알고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16년 동안 곁에서 지켜보았던 우리 일가와는 비교할 수가 없지. 그분의 가장 커다란 미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상하고 고운 성품이시다.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느냐?”

“아버님!”


이리나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듯이 외쳤지만 그는 오히려 인상을 쓰면서 그녀를 나무라 왔다.


“어허! 이런 미담은 유레시아 대륙 전체에알려져야 하니까 말리지 마라. 아무리 과거가 창피하다고 해서 숨기고 있어서야 쓰겠느냐? 크흠, 그러니까 이 작은 도련님께서 우리 아스트라세 일가의 가슴을 어떻게 사로잡으셨냐면 말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당시에 9살이었던 이리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왈가닥 여장부로 동년배 무장 수련생들을 이끌고 다녔던 골목대장이었다.

수련생들은 신분에 따라서 차등이 있는 개인 과외가 별도로 이루어졌지만, 이것만 제외한다면 모두 같은 김나지움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고 자유대련과 경쟁을 통해서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는데, 앞으로 제니아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들이 후계자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뭉쳐서 파벌이 형성되도록 유도하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법.

서로가 허물없이 지내다 보면 하늘 같은 상하 관계도 자연스럽게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는데 이리나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수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서열 2위로서 철저하게 리한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다른 수련생들이 감히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도록 보좌해야 했지만, 원래부터 청개구리 왈가닥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동세대 최고의 재능과 야망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있던 그녀는 이 세상 착해빠지고 유약한 도련님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 앞에서는 여우 가면을 쓰고 내숭을 떨었지만 뒤돌아서기가 무섭게 본색을 드러내더니 하극상을 일으켜버리고 말았다.


이름하여 주군으로 모시는 사람이 알고 봤더니 김나지움에서는 빵셔틀 호구? 플랜.

넘치는 카리스마와 타고난 지도력으로 순식간에 동년배 훈련생들을 휘어잡은 그녀는 반의 일진으로 등극하고 리한을 앞장서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죄의식이 없는 어린아이가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뜩이나 태중양생술과 조기교육으로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나는 집단의 가혹행위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

단순하게 스트레스를 패기 위해서 두드려 패는 것은 일상이었고, 새롭게 배운 무공의 파괴력을 시험해보겠다며 부상을 입힌다거나, 온갖 악질적인 괴롭힘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며 궁지에 몰아놓는 것을 즐겼으며 태풍이 몰아치는 벼랑 끝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아 놓거나, 바위에 묶어서 바닥없는 늪에 던져 버리는 생명을위협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종가의 특혜를 누리면서 동년배보다 높은 성취로 금강투합체를(맷집)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겨우 10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는 괴롭힘.

어느 순간부터 귀하신 후계자님의 몸에 상처가 끊이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종가에서 김나지움에 조사와 감찰을 진행했지만, 이리나와 패거리가 입을 맞추고 교묘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았던 데다가 리한은 리한대로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바람에 번번이 어영부영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나왔다고 해서 처우가 나아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주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호구라며 깔봤고 어른들도 알고 보니 별거 없다며, 괴롭히는 수위에도 브레이크가 없이 점점 가학적으로 가중되기만 할 뿐이었다.

특이한 것은 리한이 시종일관 그런 괴롭힘을 묵묵하게 감당해냈다는 것이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곤란하다는 듯이 멋쩍게 웃어넘긴 후에 툭툭 털어버리며 일어나버리는 소년.

어떻게 보면최강의 빵셔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이런 폐단이 쌓이고 쌓여서, 대형 사고로 발전해버리는 단초를 제공해버리고 말았다.

테르할 제국에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천공 기사단의 와이번이 있는 것처럼, 오팔 왕국에도 비대칭 전력으로 블랙이글 기사단을 결성하여 여러 영지에 그리폰 둥지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기사들이 자신의 검과 말을 분신처럼 애지중지하듯이 그리폰 또한 왕국 최강의 무장을 꿈꾸는 아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 그 자체.

이리나 또한 미덥지 못한 리한을 장래에 주군으로 섬기는 것보다는 블랙 이글 기사단의 차기 단장이 되어서, 제니아를 떠나 오팔 왕국의 창공을 자유롭게 누비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런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루돌프가 일곱 번째 생일에 맞춰서 부화시키고 선물해준 어린 그리폰, 피리오스.


하루라도 빠르게 자신의 분신을 타고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3년 동안에 겨우 새끼 망아지보다 조금  크게 자랐을 뿐이기에 기다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언제나 애를 태웠다.

그래서였을까?

우연한 기회에 그리폰이 가장 좋아한다는 렘디아스산 한혈마 고기를 손에 넣은 이리나는 피리오스에게 이 특별한 별미를 조금이라도 빨리 전달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라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무모한 모험까지 감행해버리게 했다.


커다란 그리폰을 보고 싶어 하는 동년배 아이들을 꼬드겨서 밤중에 몰래 둥지에 잠입해버린 그녀.

어째서인지 평소에는얌전하던 리한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결사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했지만, 소년의 얼굴은 김나지움을 자유롭게 빠져나올  있는 프리 패스였던 데다가 어른들에게 들켜도 후계자가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처벌 수위가 약해지기 때문에 반강제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이것이 어떤 비극을 초래할지는 꿈에도 모르는 체.

계획은 나름대로 치밀했다.


이미 뇌물과 협박을 통해서 포섭한 사육사의 협조를 받아서 빠르고 안전하게 둥지로 잠입해 들어가서, 피리아스 하나만 조심스럽게 깨우고 특식을 먹인 후에 곧바로 빠져나온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커다란 그리폰에게 먹이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피 냄새가 흥건하게 배어있는 말고기를 몰래 가지고 들어온 귀족 자제.

덕분에 예민한 후각을가지고 있던 그리폰들이 흥분해서일제히 깨어나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와이번만큼 호전적이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녀석들.

평화롭게 잠들어있다가 불청객 때문에 깨어나 버린 것도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만, 아이가 가져온 먹이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위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급하게 달려온 수많은 사육사가 죽거나 다쳤으며, 현장에서 사망한 그리폰이 3마리, 심각한 부상으로 두 번 다시는 하늘을 날 수가 없기에 폐사 처분이 내려진 것이 9마리었다.

하지만 그보다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몰래 숨어들었던 고위 귀족 자제가 2명이나 사망하고 리한마저 커다란 중상을 입어버렷던 것이다.

당시에 이리나는 곧바로 도망쳐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피리오스를 지키겠다며 억지를 부렸는데, 소년이 그것을 보호하려다가 날카로운 발톱에 할퀴어져서 오른쪽 팔이 거의 잘려나갈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상비하고 있던 포션으로 빠르게 응급처치를 하고 사제의 치료까지 받아서 완치하기는 했지만, 이 대형사고에 제니아 전체가 발칵 뒤집혀버린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에 피해를 본 가신들이 달려와서 종가에 강력한 처벌을 호소했고, 평소에 온화한 성품으로유명했던 마르텔조차 치를 떨면서 사태를 일으킨 아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죄인이 쓰는 칼을 차고서 형장에 끌려오는 주동자들.

지금까지 오냐오냐하며 예뻐해 주던 어른들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살기등등하게 쳐다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거기에 가차 없이 심문을 진행하며 으름장을 놓아대자 완전히 겁에 질려서 다리를 덜덜 떨고 오줌까지 지려버리고 말았다.


거기에서도 리한은 입장이 있어서 크게 추궁당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마르텔에게 이례적으로 상당한 질책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여기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누구도 예외 없이 주동자였던 이리나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거기에 후계자를 악질적으로 괴롭혀온 지난 행적을 모조리 까발려버리면서, 거기에 동참했던 자신들은 그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곤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던 이리나를 단숨에 벼랑 끝으로 몰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자업자득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배신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으로부터 완벽하게 버려져서 고립되어버리고 말았다.


사태를 정리해보니 그녀 하나만 처벌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루돌프까지 소환되어서 책임을 따지게 되었고 무장의 생명이라고  수 있는 부녀의  손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에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리한이 앞으로 나서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행동으로 집행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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