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재회(3)
벡워스에 정박한 아스트라세 일가가 수십 명의 팔콘 전사들을 이끌고 내려오자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선착장의 관리와 병사들, 분주하게 짐을 실어나르는 일꾼들에서부터 배에 오르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승객들까지 허둥지둥 길을 터주며 무릎을 꿇었고, 얼마 후에 강가의 요새로부터 연락을 받은 경비대가 달려오고 나서야 간신히 혼란이 수습되었다.
“충성! 아스트라세 자작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벡워스에 어서 오십시오!!”
“귀관은 누구인가?”
하늘색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있는 여성 지휘관이 경례해 오자 루돌프가 물었다.
“네! 소관은 현재 벡워스의 경비대장 대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지젤 프리먼이라고 합니다. 자작님께서 이곳에 체류하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흠, 대리라? 본인은 어쩌고 수하를 보내온 거지? 설마 바지에 오줌을 지려서 도망쳐버린 것은 아니냐?”
하하하하하하하!
비꼬는 말에 수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대장님께서는 영주님에게 호출을 받아서 급한 일을 처리하러 가셨습니다. 소관이 비록 자작님을 모시기에는 미흡한 입장이라고는 하나, 최선을 다해서 수행할 테니 부디 너그럽게 선처해주십시오!”
“호오.”
상관을 모욕했으니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해오자 나직하게 탄성을 뱉어내었다.
“알았다, 그래도 너희 경비대가 최소한 요새에 있던 겁쟁이들보다는 기개가 있구나. 어차피 벡워스의 실정을 몰라서 그렇지 않아도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자진해서 도와준다면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도록 하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스트라세 일가는 뺨 보호대가매의 날개로 양각된 투구를 일제히 벗었다.
“앗?!”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후후후후. 우리 아스트라세 일가의 특색에 놀란 모양이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를…”
“익숙한 반응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눈썹과 수염까지 새하얀 것은 처음 볼 테지. 우리 일가가 익히고 있는 무공 때문에 그렇다. 설영빙천공이라고 하지.”
“과연! 고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물 안의 개구리가 개안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작님!”
“흥! 쓸데없는 아부는 필요 없다. 그보다 본가의 용건이 화급을 다투니까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지. 랜달아!”
“네, 아버님!”
자식을 호명하자 앞으로 나서서 한 장의 초상화를 펼쳐보였다.
촤아아악!
“경비대장 대리! 이미 우리의 경애하는 종가에서 왕국 전역에 수배서를 보냈으니 자초지종은 알고 있겠지? 그러니 각설하고 묻겠다. 최근에 이 벡워스에서 3년 전에 실종된 후계자님께서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항이 있는가?”
“헉?!!”
쿵!
예상하지 못한 인상 파기와 정면으로 마주한 지젤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져 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이분이, 이분이 아슈킬 가문에서 실종된 후계자님이라고? 테르할 제국의 첩자가 아니라?? 이럴 수는 없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일어나다니…’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은 바로 며칠 전에 경비대장인 멜더릭과 함께 벡워스 용병 길드의 몰락의 배후로 지목했던 자였다.
그가 스파이라는 증거는 없었지만 통상적인 법의 제재를 받지않는 특권 계층일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부랴부랴 휴크 남작에게 보고를 했다.
단순하게 여기까지만 진행되었다면 사소한 오해였다고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문제는 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냐, 대리! 지금 자작님께서 하문하고 있지 않느냐? 후계자님의 신변 정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당장 정보를 공개해라! 혹시 아는 것이 없다면 지금 당장 도시에 있는 경비병들을 모조리 동원해서라도 찾아내라는 말이다!!”
“그, 그것이 그러니까…”
궁지에 몰린 지젤은 완벽하게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바로 지금, 그의 상관인 멜더릭이 남작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당사자를 구금하기 위한 기습작전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러한 결단이 내려졌던가.
[그토록 용의주도한 인물이라면 꼬리를 잡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신병을 확보하도록 하겠다!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털어놓게 한 후에 살인멸구를 해라! 후작 각하께서 주최하시는 뱃놀이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돼!]
바로, 보고를 받은 휴크 남작 스스로가 과감하게 나서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상태.
제니아의 선봉 돌격대로서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한 눈앞의 아스트라세 자작 일가가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어떠한 끔찍한 사태가 일어나 버릴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마치 귀신에 씌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아. 도대체 어쩌다가 사람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거지?’
패닉에 빠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지젤이었지만 사실, 멜더릭과 그녀가 리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루돌프가말했던 것처럼 그의 수배서가 왕국 전역에 뿌려졌었다고는 하나, 3년 전에도 수색을 중단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죽었을 거라고 단정을 지었던 인물.
아무리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용모에 대한 인상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던 데다가, 왼쪽 눈에 새겨져 있는 불꽃 흉터가 너무나 강렬해서 생김새의 다른 특징을 기억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마저도 아토스의 저택 앞에서 마주했을 당시에는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었고, 평범한 귀족하고는 다른 특이한 스타일의 빨간 정장까지 차려입었으니 그를 후계자와 매칭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스트라세 자작 일가가 당사자를 완벽하게 재현해놓은 초상화를 앞으로 들이밀고 나서야 간신히 그의 신원을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 뭔가 낌새가 이상합니다. 태도를 보아하니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강하게 문초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나도 마침 그러려던 참이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작님!”
속삭이는 대화를 듣고 화들짝 놀란 지젤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외쳤다.
“사, 사실은 후계자님이 머무르시는장소에 대해서 짚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경비대 본부와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오, 그래? 그렇다면 너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로군. 어서 빨리 연락을 취해라! 꾸물거리지 말고.”
이번 사태를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재빠르게 메시지 스크롤을 사용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연결되어라. 제발!’
[치지지지지직-]
멜더릭에게 연락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했지만 들려오는 것은 시끄럽기 이를 데가 없는 잡음뿐.
그것은 최후의 희망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면 첩자로 의심되는 리한을 구금하기 위해서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차단해버리는 광범위한 통신 방해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외통수에 몰린 지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 연결되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자작님! 생각해보니 오늘이 마침 칠요절이었군요! 아무래도 모두 교단의 행상에 참여해버린 모양입니다. 대신에 제가 제보를 받은 장소로 안내해드릴 테니…”
“지금 본가를 우롱하는 것이냐?”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분노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협박해오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틀림없이 후계자님이 거처하는장소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흐음. 뭐, 좋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우왕좌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하도록 해라. 왜냐면 오팔 왕국 전체를 뒤져봐도 본가보다 성질이 급한 귀족들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거든. 너만이 아니라, 남작령 전체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쓸데없는 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마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지젤이었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후회로 절규를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보, 바보, 바보, 바보, 바보!! 어째서 후계자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대답한 거야? 경비병들을 시켜서 조사해보겠다고 했으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스트라세 일가가 마음대로 벡워스를 헤집고 다니는 것을 막아냈으니, 이것이 최선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현재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작이 최대한 빠르게 오해를 풀어서 작전을 중지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전부.
일행을 최대한 느리게 안내하면서 목적지를 크게 우회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성질이 급하고 눈치마저 날카로운 아스트라세 일가 앞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왜 똑바로 나아가지 않고 빙빙 돌아가는 것이냐? 쓸데없는 수작을 부렸다가는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본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이쪽 길에는 도로 공사가 진행중이라…”
“그따위 장애물은 우리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엉뚱한 장소로 이끌었다가는 손발을 하나씩 잘라내 주지. 모가지만 남아있어도 길 안내는 가능하겠지?”
“히끅?! 제대로 하겠습니다!”
섬뜩한 협박에 울며 겨자 먹기로 길을 안내할 수밖에 없었던 지젤은 작전 구역에 도착할 무렵에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직 진행 중이야. 망했어, 젠장!’
통행을 가로막고 있는 차단소에 도착한 일행.
“충성! 지젤 부대장님이 아니십니까?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그리고 뒤에 있는 분들은 누구십니까?”
“이분은 제니아의 아스트라세 자작님이다! 본령을 방문하신 귀한 손님으로서 이 앞에 특별한 볼일이 있으시니 지금 즉시 차단소를 개방해라!”
“배, 백귀 아스트라세?! 대, 대단히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작님이라도 통행을 허락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직립 부동으로 대답하면서도 고집을 부리자 지젤의 아미가 대번에 일그러졌다.
“평범한 상황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차단소를…”
“기다려라, 지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는 병사를 나무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자, 자작님.”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려고 애를 쓰던 지젤은 루돌프가 앞으로 나서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버린 상태.
“이름이 뭐지?”
“빌리라고 합니다. 자작님!”
“빌리, 빌리, 빌리…대단한 영웅심을 발휘하는 것 치고는 평범한 이름이구나. 먼저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지. 대체 이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차단소까지 설치해서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지?”
“기, 기밀 사항이기에 자세한 사항을 가르쳐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지의 중대사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에 남작님께서 직접 출두하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대를 차단하고 설령 국왕 폐하라도 출입을 못하게 하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만…”
“하하하하하! 국왕 폐하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니, 그렇게까지 나오신다면야 어쩔 수가 없지. 어쩔 수 없어.”
어깨를 두드려대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였지만,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더니 한기가 서려있는 듯한 차가운 음성을 뱉어내었다.
“하지만 이 앞에 계시는 분은 우리 일가에게 국왕 폐하보다도 중요한 분이라서 말이다.”